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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수운 작가 우듬지 Aug 23. 2021

작은 고추, 아니 고추는 그냥 맵다

맨손으로 고추 손질하다가 불지옥에 갈 뻔 한 썰

인스타그램 연재글 @woodumi


지난 주말 시댁에 다녀왔다. 공무원을 은퇴하신 아버님은 요즘 텃밭 가꾸기에 빠져계신다. 항상 전화상으로만 듣던 텃밭은 실제로 보니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드넓었다. 한 100평쯤 되려나. 그곳에는 무성한 잡초들과 함께 다양한 것들이 심어져 있었다. 상추, 깻잎, 강낭콩, 당귀, 가지, 홍고추와 청양고추, 대파, 옥수수 등등. 그간 내가 마트에서 꼬박꼬박 성실히 구매해온 온갖 농작물들이, 아버님의 밭에 잔뜩 무상으로 널려있었다.


시댁의 식탁에는 당연히 텃밭에서 뜯어온 각종 야채가 풍성하게 올라왔다. 모든 반찬과 김치가 텃밭에서 난 작물들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마만큼의 야채를 먹으려면 마트에 얼마를 지불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나는 그만 텃밭의 생산력에 감탄하고 말았다. (물론 텃밭에 씨를 심는 초기 비용은 있었을 테지만) 이것이 바로 말로만 듣던 창조경제인가. 


시댁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머님은 바리바리 농작물을 싸주셨다. 그렇게 남편의 차 트렁크 한가득 농작물을 싣고 돌아와 우리 집 냉장고에 켜켜이 쟁여두니, 곳간에 쌀을 한가득 쌓아둔 탐관오리처럼 어찌나 마음이 두둑하던지. 하지만 야채는 엄청난 속도로 시들어가는 존재들이었다. 며칠만 방치해도 미친 듯이 싹이 나거나(감자와 고구마 친구들), 미친 듯이 물러진다(이파리 달린 모든 친구들). 그래서 먹을 만큼만 냉장고에 남겨두고 나머지는 냉동실에 소분해야 하는 것이, 야채를 대하는 주부의 필수 마음가짐이었다. 


이런저런 일로 바빴던 터라, 대략 일주일이 지난 어젯밤이 되어서야 야채를 꺼내 소분을 시작했다. 대파는 얼려서 그때그때 꺼내 쓰면 매우 유용한 야채로, 손가락 두 마디 정도 크기로 뚝뚝 썰어 지퍼백에 넣어 냉동실에 보관했다. 가지는 금방 물렁해지므로 바로 쪄서 나물로 무쳐버렸고, 강낭콩은 얼렸다가 밥을 할 때 넣어서 같이 찌면 되기에 냉동실로 직행했다. 문제는 홍고추와 청양고추였다.


처음으로 집에 고추를 들인 이유 (사진출처:핀터레스트)


나의 남편은 스무 살 때 파닭과 고추를 먹고 배탈이 난 이후로, 지금껏 트라우마에 시달려 파와 고추를 먹지 않고 있다. 그래서 부인인 나도 덩달아 파-고추 보이콧을 실천 중이다. 그래도 음식 할 때 맛을 내려면 파는 필수로 있어야 하니, 손쉽게 남편이 건져낼 수 있도록 파를 큼직하게 썰어서 넣는 식으로 요리를 해왔더랬다. 하지만 고추는, 파처럼 향미를 돋우는 필수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그래서 지금껏 결혼해서 고추를 내 손으로 사본 일이 없었더랬다. 내가 매운맛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남편과 따로 요리해먹는 일은 없었으니까. 


사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손질해본 일도 없었다. 그렇게 결혼 2년 차에 처음으로 우리 집에 들어온 홍고추와 청양고추. 남편이 먹지 않는다고 어찌 시부모님이 정성껏 길러서 주신 고추를 버릴 쏘냐. '그래, 나라도 먹자'라는 심산으로 나는 난생처음 고추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대략 30개에 달하는 홍고추와 청양고추를, 호기롭게, 맨 손으로 착착착.



고추를 썰 때는 분명 아무 느낌이 없었다. 얇게 슬라이스로 썰어 뿌듯한 마음으로 냉동실에 넣은 후에는, 주방을 정리하고 샤워를 했다. 그런데 샤워를 하고 나오자 갑자기 손가락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고추와 고추씨를 그대로 만졌던 왼손의 엄지와 검지, 중지가. 화형을 당하면 그런 느낌일까. 누군가가 라이터로 지지는 듯이 손가락이 뜨겁고 아려왔다. 


이러다 말겠지 싶었던 나는 남편과 티브이를 보며 복숭아를 먹었다. 하지만 갈수록 손가락이 더 심하게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급기야는 너무 아파서 내가 복숭아도 먹지 못하자, 내 입에 남편이 복숭아를 넣어주었다. 나는 복숭아고 나발이고 즉시 접시에 얼음물을 담아 손가락을 담갔다. 


하지만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매운 음식을 먹고 난 뒤 얼음물로 입을 채워봐야 삼키고 나면 다시 혀가 뜨거워지는 이치와 다를 게 없었다. 얼음물에 담그고 있을 때만 잠시 괜찮을 뿐, 손가락을 빼는 즉시 엄청난 열감이 다시 손가락으로 몰려드는 것이었다. 더 억울한 건, 분명 손가락이 흘러내리는 듯 아픈데 막상 눈으로 보기엔 아무 이상이 없다는 거였다. 그냥 멀쩡한 손가락이었다. 남편이 이런 나를 엄살이라고 생각할까 봐 노여웠다.


"아 너무 심각해, 너무 뜨겁고 아파. 진짜야, 미치겠어"


10여분이 지나도, 심지어 30여분이 지나도 손가락의 고통은 줄어들 생각을 안 했다. 급기야 내가 발을 동동 구르고 난리를 치자 남편은 나의 증상을 인터넷에 폭풍 검색했다. 검색어 : 청양고추 화상.



어서와, 고추 화상은 처음이지? (사진출처:핀터레스트)


검색에 의해 진단된 나의 정확한 증상은 '캡사이신 화상'이었다. 주부들에게는 흔한 일인듯했다. 검색 결과창에는 고추를 손질하다 캡사이신 화상을 입었다는 주부들의 성토대회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누가 불로 지지는 것 같다, 뜨겁고 아려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타이레놀을 먹어도 소용이 없다, 응급실을 가도 별다른 처방이 없다, 손가락을 자르고 싶다 등등. 저마다 고추에 데인 주부들의 눈물겨운 사연이 생생하게 적혀있었다. 그중 가장 무서운 말은 이것이었다. 


"그냥 기다리세요. 시간이 약입니다. 짧으면 몇 시간, 길면 하루 이틀 내로 끝납니다"


오 마이 갓. 하루 이틀? 여러 주부님들의 후기를 읽어보니 길게는 이틀까지도 증상이 가는 경우가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고작 왼손에 닿은 30여 개의 고추가 전부였지만, 다진 양념을 만든다고 마늘과 고추를 맨손으로 팍팍 주무른 주부들도 상당해 보였다. 양손이 이틀씩이나 타들어갔을 그녀들에게 감정이입이 어찌나 되던지. 근데, 나도 이틀이나 가는 건 아니겠지?


남편은 겁먹은 내게, 인터넷에서 본 대로 여러 가지의 처방을 적극적으로 알려주었다. 비누로 열심히 손을 씻어보았다. (소용없음) 캡사이신은 지용성이라 기름에 녹는다고 해서 바셀린을 발라보기도 했다. (소용없음) 우유에 손가락을 담그면 괜찮아진다고 했으나 애석하게도 집에 우유가 없었다. 그러다 집에 있던 화상연고를 용케 발견해 이를 발라보았다. (역시 소용없음) 열감이 최고조를 달하던 1시간까지는 그 어떤 짓을 해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제 막 발화가 진행된 화재현장에 가느다란 물줄기를 뿌리는 격이었을까. 


결국 나는 화상연고를 잔뜩 바르고 라텍스 장갑을 낀 채 잠자리에 들었다. 잠이라도 자야지.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진다고 하니까, 시간을 믿어보는 수밖엔 없었으므로. 다행히 오늘 아침 일어나니, 거짓말처럼 손가락의 고통은 사라져 있었다. 누구는 통증이 이틀도 간다는데, 나는 12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끝난 것이다. 할렐루야! 




문득 생각이 들었다. 즐겁게 고추를 싸주시던 어머님은 왜 내게 말씀해주시지 않았을까. "듬지야, 요 고추는 다듬을 때 꼬-옥 장갑 껴야 된다"라고. 겨우 십분 남짓 만지는데도 이 사달이 나는 일이라면, 이건 정말 몇 번이고 주의사항을 일러줘야 할 위험한 농작물이 아닌가? 그래도 살림 2년 차인 내가 그 정도는 알 거라고 생각하셨던 걸까. 그러나 애꿎은 원망을 해보기엔, 냉장고가 터질 만큼 농작물을 주시고도 내게 더 주고 싶어 하시는 울 어머님은 천사나 다름없으시기에, 그저 무지한 나 자신을 탓해본다.


더불어, 한껏 매운맛에 길들여진 내 혀와 내 위장과 대장에게도 몹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매운 음식을 내 몸에 넣어왔던가. 지문이 불에 타 없어지는 것 같은 이 고통에도, 혀와 장기들은 차근차근 적응해 결국, '어 좀 맵네?'정도로 무뎌져 왔을 터. 미안하다, 내 혀와 장기들아... 다시는 쓸데없는 맵부심을 부리며 괴롭히지 않을게.


이런 웃기면서도 짜증스러운 해프닝을 겪을 때마다 남편은 나를 위로하듯 "그래도 글 쓸 거 하나 생겼네"하고 말하지만, 내 속내는 그렇다. 아.. 진짜 이 캡사이신 화상은, 평생 글감이 없어서 머리를 쥐어짜야 한대도 절대 겪고 싶지 않은 고통이라고. 작은 고추가 매운 게 아니라, 작은 고추건 큰 고추건 고추는 그냥 미치게 맵다. 이번 기회에 정말 호되게 배웠다. 손가락을 활활 태워가며 얻은 생활 속의 작고 소중한 지혜다. 


그러니 내 혀가 괜찮다고 방심하지 말지어다. 손에 닿았다가는 지옥불을 경험하게 될지니. 고추 손질에는 장갑이 필수임을 명심하고 또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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