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증 놓고 공한 간 썰부터 베일에 가려진 나의 동행자까지!
1.
너무 오랜만에 간 제주
아주 오랜만에 제주를 다녀왔다. 제주도를 마지막으로 방문한 기억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때문일까, 제주도를 갈 때는 여권이나 비자가 필요 없다는 사실만 복기하며 공항에 신분증도 들고 가지 않았다. 직원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신분증이 없으세요?”라고 물었고, 나는 부끄러웠다. 공항 룰도 모르는 촌년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니 그게 아니라요, 너무 오랜만에 가는 거라 그래요... 결국 나는 공항에서 신분증을 제출하기 위해 무인민원발급기를 이용했다. 이런 사람이 많지 않은 모양인지 직원도 상급자한테 물어보며 같이 헤맸다. 더욱 부끄러웠다.
2.
많이 변한 제주
사실 내 뿌리의 일부는 제주도로부터 기인한다. 나의 친정엄마가 유년기를 보낸 곳이 제주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어릴 적 외할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제주도를 제법 많이 갔었다. 그런 이유 탓에 성인이 되어서도 제주도로는 여행 갈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 제주 아는데? 내 외가댁이 제주라고! 하는 어떤 오기의 마음. 하지만 그때로부터 제주는 변해도 아주 많이 변했다. 나 어릴 적엔 테디베어 박물관이랑 여미지 식물원이 최고였는데, 이제는 아무도 거길 가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요새는 힙하고 세련된 것들로 단단히 무장한 제주여서, 내가 아는 제주는 없다고 해도 무방하겠다.
3.
남편이랑 간 거 아니에요
내가 제주도를 간다고 인스타그램에 공지를 올리니 모두가 남편이랑 가는 줄 알고 남편에게 연락을 해왔단다. 내 친구들도 으레 내가 남편이랑 가는 줄 알고 카톡을 보내왔다.
“훈이랑 제주도 가? 좋은 시간 보내”
“앗, 남편이랑 가는 거 아냐^^”
그러고 보니 남편과 여행한 지가 참 오래전 일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치만 둘 다 서운해하지 않는 걸로 봐선, 참 잘 맞는 사람끼리 만났구나 싶다. 자기랑 안 간다고 토라지거나 나무라기는커녕 제주도에 잘 다녀오라며 용돈까지 쥐어주는 남편. 참으로 묘한 구석을 통해 내 남편의 장점을 깨닫는다. 적당히 무던한 성격도 배우자의 미덕인 듯하다.
4.
저의 동행자는요
이번 여행을 함께 한 동행자는, 몇 해 전 내게 일을 맡겨주셨던 한 연구소의 박사님이셨다. 박사님은 유일하게 일이 끝나고도 개인적 연락을 이어가고 있는, 내가 정말 존경하는 분이시다. 그러나 여행은 또 다른 얘기겠지? 어떻게 보면 상사였던 사람과 개인적인 여행이라니, 이런 나를 두고 친구가 말한다.
“넌 이럴 때 보면 참 외향적이야”
맞다. 누가 봐도 불편한 여행일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크게 고민하지 않고 내가 제주행을 택한 건, 제주 한달살이를 하고 계신 박사님께서, 다른 많은 친구분들과 가족들 사이에서 나를 떠올려주셨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했기 때문이다. 이럴 때 보면 그래 난 참 외향적이다.
5.
MSG 여행자의 순한 맛 여행
박사님과 여행을 하며 나는 깨달았다. 사람의 결은 여행 스타일에도 묻어난다고. 나로 말하자면, 오만군데의 랜드마크와 맛집을 섭렵하며 바쁘게 돌아다니고, 사진을 2만 장쯤 찍어재끼고, 일정이 끝난 뒤 숙소에서도 과음을 하며 새벽 세네시까지 동행자와 수다를 떨다 잠드는 그런 자극적인 여행자다. 타고난 흥과 욕심이 많은 탓이다. 그러나 박사님의 여행 스타일은 나와는 달리 아주 정적이고, 반듯하고, 하나하나 오래오래 음미하는 쪽이었다. 여행법도 박사님 본연의 색을 닮은 것이다. 안 좋게 말하면 재미는 없었지만, 달리 말하면 MSG를 덜어낸 원재료 그대로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여행이었달까. 고로 나는 깨달았다. 어쩌면 내가 해 온 것이 여행의 전부는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걸. 세상엔 다양한 여행법이 있는데, 나는 그간 한 가지 여행법만을 지독하게 고집해왔는지도 모른다.
6.
다름에도 곁에 머물고 싶은 건 애정이야
어쩌면 결이 사뭇 다르다고 할 수 있는 박사님과 함께 MSG를 걷어낸 여행을 하면서 나는 또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분명 내 기준에는 너무 슴슴해서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여행이었는데, 이상하게 박사님을 향한 존경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좋은 분이라는 생각이 더 굳어졌다. 나와는 결이 다름에도 인연을 이어가고 싶다는 기분을 느낄 때, 나는 누군가에 대한 애정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꾸만 그 사람의 눈에 비칠 나를 생각한다. 말괄량이 같을 나, 미숙해 보일 나, 여행지의 화려한 외피를 쫓느라 자연의 아름다움과 역사를 알지 못하는 나. 나는 자꾸만 박사님 눈에 비칠 이런 내 모습을 점검하게 된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7.
제주도에서 자란 이의 최후
이건 좀 다른 이야기지만 제주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제주도에서 유년기를 보낸 엄마가 늘 해주는 이야기다. “엄마는 어릴 때 너무 가난해서 바닷가에 가서 전복을 캐먹고 해삼이랑 성게를 주워 먹었어. 그때는 소시지 먹는 애들이 너무 부러웠지” 그로부터 반세기가 흐른 지금. 이제는 돈 없는 자들이 소시지를 구워 먹고 돈 많은 자들이 우니와 전복을 먹으러 최고급 일식당엘 가니...,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봐야 할 일일까. 지금도 해산물에 큰 감흥이 없는 나의 친정엄마는, 그 시절 너무 가난해서 전복과 우니와 옥돔과 고등어를 먹은 결과 현재 너무도 건강한 체력을 보유 중이시다. 지금 와서 보니 울 엄마가 승자가 아니겠는가.
8.
너무 많이 변해서 슬픈 제주
앞서도 말했지만 제주는 내가 알던 때와 달리 많이 변해있었다. 무지무지 힙하고 세련된 감성의 무엇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때로는 그 점이 좋다. 하지만 반드시 좋지만은 않은 것도 같다. 여행자들을 너무 의식한 관광지가 결국 어떤 길을 걷는지 익히 알고 있어서다. 이태원의 경리단길이, 전주 한옥마을이, 북촌과 서촌이 모두 같은 길을 걸어왔으니까. 힙한 것은 전통을 밀어낸다. 서울에도 백만 개쯤 있는 세련된 가게가 들어서면서, 그 자리를 오래 지켰던 색이 바래진다. 그렇게 해서 변한 관광지가 과연 진정 그 지역을 대변할 수 있는 걸까. 여전히 나는 힙한 것이 좋지만, 가끔은 여행지의 진짜 모습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슬프다. 제주가 너무 많이 변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2022 먹고 여행하라 ⓒ All rights reserved.
인스타그램 @woodum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