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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수운 작가 우듬지 Oct 20. 2022

산책에 대한, 산책을 위한, 산문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정지돈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산책에 관한 가장 심오하고 깊은 산문



산책. 산책이라는 단어는 그냥 좋다. 단어 자체가 주는 유유자적한 느낌. 방해받지 않고 온전히 나만의 시간인 듯한 그 느낌이 좋아서다. 정지돈 작가의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은 작가가 서울과 파리를 걸으며 생각한 이야기들을 담은 산문집이다.     


솔직한 내 첫인상을 이야기하자면, ‘어렵다’였다. 산문집이 어렵다는 인상을 받은 것은 실로 처음. 하지만 그 어려움은 ‘그래서 읽기 싫다’ 류의 어려움은 아니었다. 뭐랄까, 독자의 어떤 지적 열망을 긍정적으로 자극하는 느낌을 준다.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내가 얼마나 모르는 게 많으며 공부하고 싶은 게 많은지를 깨닫게 해준달까.      


작가는 정말이지 산책을 하면서 떠오르는 수많은 방대한 지식을 거의 의식의 흐름대로 적어놓았는데, 어떻게 이 많은 지식을 머리에 담고 있는지 경이로울 지경이다. 산책과 관련한 인물, 역사와 문화, 철학적 개념들. 더불어 서울과 파리의 도시계획과 젠트리피케이션, 대기업 프랜차이즈가 어떻게 자본주의를 만나 도심을 지배하는지까지... 일일이 다 이해하거나 욀 수 없을 만큼 정말로 방대한 지식이 책에 적혀있었다. 나의 작은 뇌로 받아들인 몇 가지 기억나는 일화는 겨우 이런 것들이다.     


1. 프랑스어로 ‘플라뇌르(flaneur)’라는 어여쁜 어감의 말은 ‘도시 산책자’라는 말이다. 우아한 느낌의 산책보다는 어수선하고 산만한 도시를 산책하는 느낌이 크다. 도심에 사는 우리는 모두 ‘플라뇌르’인 지도.  

2. 쇼핑몰의 ‘몰’은 ‘우아하게 산책하기 좋은 곳’이라는 뜻이다. 공공장소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탄생하였으나 점차 자본화되었고, 도시인들은 그곳에서 ‘산책’을 하고 있다.

3. 도시의 산책은 매우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이 도시를 두 발로 가로지르든, 자전거를 타든, 전동 퀵보드를 타든 넓은 의미에서는 모두 산책에 포함되는 개념일 수 있다.

4. 우리나라 도시 계획은 참 ‘산책’하기 힘들게 설계되었다. 

5. 서글프지만 ‘웹 서핑’도 산책의 일부라는 사실. 우리는 웹상에서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산책을 하고 있었다. 실제 세계에서 산책을 못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는 산책을 몰랐던 건지도



산책이라는 개념에 이토록 많은 개념이 얼기설기 얽혀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단순히 밖을 걷는 행위라고만 생각했는데, 과거에서 현재로, 자연에서 도심으로, 그리고 실제공간에서 가상공간으로. 산책에도 복잡한 역사와 결이 있음을 새로이 깨달았다. 내가 그렇게 넷플릭스를 좋아하는 것 또한, 사실은 좁은 집을 벗어나 끊임없이 세상을 걷고 싶은 내 욕망으로부터 기인한 슬픈 현상이라는 것까지도.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던데... 작가에게는 세상이 얼마나 다채롭게 느껴질까. 직접 소화한 많은 지식을 끌어와 자신의 사유와 합체하고 그로 인해 세상을 보는 눈이 아득히 넓고 깊을 작가가 심히 부러웠다.  

    

반면 이 책을 읽으며 의외로 미소 지으며 읽었던 대목들은 작가와 친구 작가들(오한기, 금정연 외)이 만나고 대화하는 내용들이었다. 어려운 부분이 나와 조금 애를 먹을라치면 작가가 친구들과의 일화를 때맞춰 등장시키는 느낌이었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은 ‘왜 만나는지도 모른 채’ 만나서 긴긴 수다를 떨고, 작가로서의 회한과 꿈을 나누고,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욕망도 나누고, 커피를 마시고, 아기 사진을 보여준다. 참 익살스럽고 정겹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우상처럼 여기는 ‘문단’의 작가들도 결국, 소탈한 사람들이구나 싶다. 언젠가 나도 그 세계에 가 닿기를...     






유익하고도 위트 있는 사유



결론. 참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이 의식대로 흐르는 글인데, 나는 안다. 이 글을 얼마나 정성들여 쓰고 퇴고했을지. 질서가 없어 보이는 듯 술술 읽히는 글 안에는 언제나 나름의 논리가 있고, 질서가 있다. 더불어 이 책에는 배우고 섬길 지식과 웃음 짓게 하는 위트도 들어있어 유익했다. 언젠가 내가 역사와 문화와 철학에 조금 더 조예가 깊어진다면, 이 산문집을 조금 더 쉽게 읽을 수 있을까? 그럴 날이 오기를 바랄 뿐이다.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책을 덮고 나니, 내가 사는 수원시 권선구에도 마땅히 걸을 곳이 없다는 생각에 억울함이 밀려온다. 멀리 동탄이나 광교호수공원에 가거나, 한강을 가야 하는데, 산책을 위해 버스를 타는 것은 어불성설이니 결국 나는 웹 산책을 택한다. 오늘도, 넷플릭스라는 공간을 걷는다.                 








              



* 완독챌린지 독파(dokpa)로부터 앰베서더 자격으로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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