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후반, 나는 다시 소녀팬이 되었다
나, 입덕한 거 같다. 고등학생 시절에도 또래친구들이 다들 빅뱅에 빠져있을 때 홀로 고고하게 팝송을 듣던 나였는데. 지금 나는 지조를 잃었다. 나보다 한참 어린 남자 아이돌의 몸짓 손짓 하나에 울고 웃는 처지가 된 것이다. 중학교 1학년 때 열렬히 좋아했던 동방신기 믹키유천 이후로 이런 느낌은 없었다.
그때로부터 14년이 흐른 지금, 나는 한 케이블채널의 아이돌 육성 프로그램인 ‘프로듀스101’의 강다니엘이라는 연습생에게 빠져 허우적대는 중이다.
엄밀히 말해서 다니엘은 아직 아이돌도 아닌 아이돌 지망생이지만, 그 아이가 보여주는 춤들과 눈웃음, 섹시하다가도 강아지같이 천진한 그 이중적인 매력은, 아. 정말이지 입덕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악마 같은 힘을 지녔다.
현재 내 핸드폰 배경화면은 강다니엘 군이며, 핸드폰 카메라앨범은 매회 방송이 끝나고 쏟아지는 다니엘의 짤들로 터질 지경이다. 지루하고 고된 취준생의 일상을 위로하기라도 하듯 그 아이는 방송에서 내게 눈웃음을 치고 춤을 춰준다. 다니엘의 마법에 걸려 나는 매주 본방사수를 위해 금요일을 기다리고, 다니엘의 원샷 분량이 없어도 매와 같은 눈으로 연습생들 사이의 다니엘을 찾아내고 있다.
이제는 내가 그 '누나'라는 범주에 든다는 것이 행복할 지경이다. 20대 후반의 여성을 열네 살 소녀팬으로 돌아가게 만든 다니엘의 매력은 무엇일까. 60센치가 넘는다는 어깨를 포함한 듬직한 피지컬? 그에 비해 강아지같이 귀여운 얼굴? 그러다가도 춤만 추면 섹시하게 돌변하는 치명적인 양면성? 아니, 이 모두가 다니엘이 전국의 누나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 매력이겠지.
‘프로듀스101’을 열렬히 시청하는 자에게는 픽(Pick)이라는 권한이 주어진다. 우리의 마음을 뚫고 들어온 소년을 우리는 인터넷 투표를 통해 픽할 수 있다. 픽은 곧 인기이며 사랑이며 권력이며 자존심이다. 나 또한 이 픽이라는 신성한 권한을 매주 행사하고 있다.
10대들의 변하지 않는 고정픽은 단연 박지훈 연습생일 것이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여리여리하고도 예쁘장한 외모. 그러나 미소년을 쫓는 10대와는 달리 2,30대의 눈은 확연히 다른 차이를 보인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남자의 떡대에 압도된다. 떡 벌어진 어깨에, 마르기보단 살짝 굵직한 느낌의 몸, 중저음의 목소리. 아마 2,30대의 그런 완벽한 이상형을 실사판으로 옮긴 연습생이 바로 강다니엘이 아닌가 싶다.
이 아이가 나보다 6살이나 어린 꼬마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분명 오빠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대단한 남성미의 소유자인데. 그러니 연애를 해볼 만큼 해봤음직한 2,30대들이 민망함을 무릅쓰고 티비 앞에서 침을 흘리고, 투표를 하고, 직캠을 하루에도 몇 번씩 돌려보는 게 아니겠는가.
연예인에 빠져 사진을 모으고, 직캠을 찾아보고, 투표까지 행사하는 일련의 ‘덕질’은 10대들의 전유물인 줄로 알았다.
우리 세대는 연예인을 섬기는 것 말고도 헤쳐나가야 할 현실의 과제들이 많기에, 그런 열정 같은 건 사라진지 오래라고 생각했다. 덕질을 하는 것이 부끄럽지는 않다. 오히려 오래전 잃어버린 줄 알았던 감정을 되찾은 것 같아서 새롭다. 소녀가 된 것 같은 설렘을 느낄 수 있어서 기쁘다. 외롭고 힘든 취준생 나부랭이에게 국민 프로듀서라는 직함을 달아주고 설렘을 선물해준 채널 엠넷에 매우 감사하고 있는 요즘이다.
내 손으로 내가 좋아하는 아이를 데뷔시키는 기회를 가지다니. 대통령 선거 이후 내 삶에 이렇게 생산적인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방송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지만, 나는 오래오래 다니엘 앓이를 할 것 같다.
나를 포함해 삶에 찌든 2,30대의 누나들에게 대단한 활력을 주고 있는 다니엘, 너에게 훈장이라도 수여하고 싶어. 너의 춤을 보는 것으로 인해 지친 하루를 치유할 수 있다는 걸 넌 알고 있을까.
나를 위로하기 위해 태어난 것만 같은 나의 아이돌 다니엘에게 오늘도 투표를 하러 가야겠다. 누나가 널 꼭 데뷔시킬게!
2017 일상의짧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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