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소고기 미역국이 먹고 싶다고 하셨어.
"소고기 미역국이 먹고 싶어. 쌀밥에."
남편이 말했다. 자신의 생일 며칠전부터 내 눈치를 슬슬 보더니 페스코 상차림으로 차릴 것 같은 예감에 미리 '소고기' 미역국이라고 확실히 의사표시를 했다.
솔직히 남편의 그 말이 아니었으면 전복과 새우를 넣은 해산물 미역국으로 끓일 참이었다. '소고기가 그렇게 좋나? 생일미역국은 꼭 소고기 미역국이어야만 할까?'
몇 달 전이라면 한숨을 푹푹 쉬며 소고기 미역국을 끓였겠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들이 좀 누그러졌다. '존중, 취향, 혐오.' 그동안 남편과 밥상을 마주하면서 여러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당신은 채식지향인 나를 존중하지 않는 것 같아. 그리고 비건이란 말만 들어도 이유없이 싫어하잖아. 이건 혐오야."
혐오금지법이 통과된 마당에 남편을 고발해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그 말에도 남편은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난 극단적인 게 제일 싫어."
남편은 언제나 '비건'이란 말에 극강으로 증오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유없는 미움. 자신에게 피해가 오지 않는데도 어떠한 편견이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
누구에게나 한번 사는 인생 각자의 행복을 위해서 살 권리가 있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면서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고, 나의 취향을 강요하진 않아야한다.
존중하면 강요하지 않는다. 존중하면 혐오하지 않는다. 취향을 강요하진 않는다. 우리의 밥상엔 서로의 취향만 있었고, 존중은 없었으며 혐오가 싹트고 있었다.
남편의 생일상은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고기잔치는 못 해줘도 소고기미역국에 쌀밥은 꼭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남편을 존중해주고 싶었다.
다른 사람을 존중해주려면 나부터 스스로를 존중해줘야한다. 나의 취향인 페스코 채식도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렇게 차린 남편의 생일상이다. 다른 손재주 있는 주부님들처럼 뻑쩍지근하게 차려주지 못해 매번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대신에 정성과 사랑을 듬뿍 넣어서 돌잔칫상처럼 분위기를 내봤다.
(남편은 제삿상 같다고 했다....)
메인 메뉴는 모두 3가지. 우리 두사람 모두가 좋아하는 두부김치. 남편은 참치 넣은 김치볶음을 좋아하는데 푹익은 묵은지에 참치를 넣어 맛있게 볶았다.
두부는 들기름에 노릇노릇 구워서 맛있는 두부김치를 만들었다. 오징어를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제철 갑오징어를 숙회로 만들어 쪽파강회와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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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매콤한 고추와 쪽파강회를 함께 먹어야 더 맛있다. 매콤함과 아삭함. 오징어의 쫄깃함과 감칠맛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초고추장과 스리라차를 섞은 너무 달지 않으면서도 맛있는 소스가 킥이었다. 마지막으론 전복버터구이. 일식조리기능사 실습을 하면서 배운 음식인데 소고기보다 좋다는 전복을 사서 내장부터 직접 손질했다. 거기에 남편이 좋아하는 버터를 적당히 넣었다.
세 메뉴 모두 남편이 좋아하는 식재료로 만들었다. 대신 고기는 없었다. 남편이 소고기 미역국과 쌀밥만 말했기 때문에.ㅋㅋㅋㅋ
내가 먹을 미역국은 따로 끓일까? 전복이나 새우 넣어서? 황태나 들깨미역국으로? 하지만 너무 번거로웠다. 남편의 생일에 미역국을 따로 따로 끓여야하다니. 강한 마음을 먹고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가는 분들이 정말 존경스럽다.
남편의 미역국엔 소고기를 듬뿍 넣어주고 내가 먹을 미역국엔 소고기는 넣지 않았다. 국물엔 역시 비리비리한(?) 소고기 냄새가 났는데 이상하게 먹고 나서 소화가 잘 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소고기를 멀리해서 그런지 가끔 이런날 먹으면 탈이 나던가 체하곤 한다. 먹었던 마음을 잘 지키지 않아서 벌을 받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밥을 먹으며 아래와 같은 규칙을 정했다.
1) 존중하되 강요하지 않는다.
2)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은 사람이 요리한다.
3) 나도 내가 먹고 싶은 요리로 페스코 채식까지만 요리하겠다.
4) 고기 요리는 먹고 싶은 사람(당신이겠쥬?)이 한다.
5) 나에게 육식을 강요하지 않는다.
6) 싱크대 바스켓은 내팽개치치 않는다. 당신이 바스켓을 내팽개치면 나는 상을 엎겠다. 등등
다음날은 남편이 좋아하는 메밀국수를 해줬다. 일식조리기능사 메뉴엔 남편이 좋아하는 메뉴가 가득하다. 그래서 내가 배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메밀국수, 삼치구이, 갑오징어명란무침, 생선조림(도미조림) 등등....
남편은 술안주로 먹을 수 있게 하루 빨리 모든 메뉴를 마스터해서 준비해달라고 한다. 특히 생선초밥을 만들며 "이랏샤이마세~!"를 외치는 나를 보고 싶다고 했다.
여보, 일본에 유학보내주면 초밥왕이 되어서 돌아올게. 이럇샤이마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