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 블로그를 시작하며 처음 썼던 닉네임이다. 제주에서 우연히 마시게 된 '오메기술'에 반해 전통주에 관심을 갖게 됐고, 그 길로 한국전통주연구소에 찾아가 가양주 담그는 걸 배웠다. 속성으로 취미삼아 배워서인지 전문가 수준은 아니지만 이젠 얼추 소량의 막걸리는 집에서 빚어 먹을 정도가 됐다.
쌀, 누룩, 물 그리고 영혼
쌀을 달래주며 천천히 씻는다. 뿌연 물 속에 귀한 금붕어가 노닐고 있는 것처럼 손을 천천히 움직인다. 그렇게 물을 따라버리고 담기를 반복하며 100번 이상 저어주어야 백세(百洗)라는 과정이 끝난다. 어느새 흐렸던 쌀뜨물이 밑바닥이 보이는 깨끗한 계곡물처럼 속이 훤하다. 내 마음도 그렇다.
나를 빚어내는 시간
만두도 빚고, 도자기도 빚고, 술도 빚는다. 손끝으로 한땀한땀 바느질하듯 무언갈 만드는 건 손끝에 마음을 실어 보내는 일이다. 술을 빚을 때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정성을 다하라고 교본에도 써있지만 빚는다는 건 정성을 훨씬 뛰어넘는 일이다.
쌀을 백 번 씻는 백세는 준비동작일뿐, 돌처럼 딱딱한 누룩을 빻아 수곡(물누룩)을 만드는데만도 땀이 주륵주륵 흐른다. 잡균이 침범하면 술맛이 상하기 때문에 모든 기구는 뜨거운 물로 소독해서 사용한다. 쌀을 불렸다가 체에 밭혀 물기가 떨어지길 기다리고, 뜨거운 고두밥을 지어 너른 곳에 얇게 핀 다음 차게 식혀야한다.
식은 고두밥에 물누룩을 넣고 손바닥으로 살살 눌러가며 치대기를 반복한다.쌀알이 부서지지 않아야 천천히 발효되면서 술맛이 좋다. 그래서 약간의 찰기가 생기면서도 밥알은 깨지지 않고 살아 있어야한다.
살살, 천천히, 깨끗하게. 술을 망치지 않으려면 내 영혼을 살살 어루만져가며 빚어야한다. 마음을 치대고 달래면서 깨끗한 영혼의 정수 한 잔이 걸러진다. 술을 빚는다는 건 영혼을 빚어 내는 일이다.
항아리 속 영혼
영어로 스피릿(spirit)은 영혼, 정신, 마음을 뜻한다. 여기에는 증류주라는 뜻도 있다. 나의 영혼을 불어 넣어 항아리 속 영혼을 만든다. 영혼이 없으면 술맛에도 영혼이 없다. 술을 빚는 다는 건 손이 매개체가 될 뿐 나의 영혼을 불어 넣는 일이다.
영혼 없이 손만 휘적거리면 항아리 속에도 영혼이 깃들지 않는다. 술을 빚어내는 과정 하나하나에 영혼, 정신, 마음을 총 동원한다. 그리고 급한 마음을 잘 어루만져 쌀을 백번 이상을 씻어 낸다. 깨끗한 물이 비치는 것처럼 내 마음도 깨끗해진다. 그러는 동안 영혼이 빚어진다. 혼을 불어 넣어 쌀과 누룩, 물로 영혼을 빚는다. 항아리 속에 든 건 누군가의 영혼이다.
솔직해야 맛있다.
속임수 없이 시간과 정성, 마음만으로 빚어지는 술. 술은 솔직해야 맛있다. 전통주는 착향료나 인공감미료 없이 깊이 있는 풍미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누룩, 쌀, 물만으로 지어내는 향긋하고, 달큰한 맛. 어쩔 때는 매실향, 어떨 때는 복숭아향, 배향도 나고 가끔은 제주에서 날아오는 산뜻한 귤향이 입맛을 돋구기도 한다. 거기에 찹쌀에서 녹아나온 자연스런 단맛은 혀끝에 감겨 미각세포와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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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채식도 그럴 수 있을까? 인공감미료나 설탕, 몸에 해로운 것 없이 건강한 레시피를 만들지만 내 뜻대로 안 될 때가 많다. 또 1일 1채식은 고사하고 시댁, 친정에서도 나에 대한 채식을 반대하는 분들이 너무 많다. 명절 때마다 한소리 들을 생각하면 머릿 속이 아찔하다.
추석 전에 술을 빚어 놓는 건 시댁과 친정에 가져가기 위함이다. 어쨌든 고기 안 먹는다고 타박 받을 때마다 내가 빚은 술 따라 놓으면서 "술은 비건인데요!"를 외치면 비건이 아니었던 식구들도 비건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그 순간만큼은 고기를 적게 먹거나 나물로 젓가락질을 더 많이하는 선택적 채식으로 갈아탈 뿐이다. 하지만 식구들은 내가 빚은 술 한 잔으로 채식에 대한 편견을 조금이나마 내려 놓는다.
찹쌀 1kg. 백세를 하면서 불순물은 걸러내고 묵은쌀 냄새도 없앨 수 있다. 처음엔 한번만 저어도 뿌옇던 쌀뜨물이 나중엔 20번을 저어도 맑은 계곡물처럼 투명하다.
누룩 200g을 곱게 빻아서 물 600ml를 넣고 7시간 이상 담가둔다. 이래야 누룩 속 효모들이 기지개를 켜면서 활성화된다. 뽀글뽀글 올라오는 기포는 효모가 살아 숨쉰다는 증거.
전기밥솥에 고두밥을 지으려면 찹쌀을 30분 정도 불린 후 물을 2컵 정도 덜 넣으면 된다. 차게 식힌 찹쌀밥과 물누룩을 한데 섞어 치댄 뒤 소독한 항아리에 넣는다.
30도에서 10일을 발효시켜 물을 섞은 후 술을 걸러낸다. 쌀의 양이나 주변 환경에 따라 술 익는 시간은 짧아질 수도, 길어질 수도 있다. 2~3일이 지나면 아이돌보듯 매일 항아리 뚜껑을 열어 술의 상태나 맛, 냄새 등을 체크하는 게 일이 된다.
실내 온도가 30도를 밑도는 추운 겨울에는 전기장판을 틀고 보온을 꼼꼼히 해줘야하지만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늦여름에는 이물질만 들어가지 않게 한겹정도 싸주면 된다.
생균막걸리라 병입하기 전에 모든 기구, 유리병을 소독한다.
술이 익으면서 숨을 쉬듯 공기방울이 뽀글뽀글 올라온다. 일주일이 지나니 잘 익은 술냄새가 나서 막걸리를 걸러봤다. 시아버님이 좋아하시는 며느리표 막걸리는 옛날스타일대로 진짜 막거른 막걸리다. 투박하게 걸러 진득한 맛이 혀에 착착 감기는 동시에 새콤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기분을 알딸딸하게 만든다.
여기에 시원한 얼음 몇 개만 동동 띄우면 물타지 않아도 진득하니 맛있는 옛날막걸리가 완성된다. 시댁에 가져가려고 3병 정도를 걸렀는데 아버님, 어머님께 드리는 선물이자 뇌물이다. 채식에 대한 잔소리를 조금이라도 덜 듣기 위한 며느리의 꼼수기도 하다.
아버님은 생선구이 안주를 좋아하시는데 내가 빚은 술 앞에서는 채식 얘기는 꺼내시지 않는다. 오히려 어머님은 나물 안주나 채소를 좋아하셔서 나랑 입맛이 가장 잘 맞으신다. 며느리 건강이 상할까봐 진심으로 걱정해주시는 마음은 술 한 잔과 함께 깊은 마음 속으로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