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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콧구멍에 일회용빨대를 꽂아주고 싶었다.

유리구두 말고 유리빨대

KakaoTalk_20230216_143329530_16.jpg 세일코너에서 장만한 유리빨대




내가 원한 것은 이 빨대가 아니었거늘.

집에서 쓰던 일회용 빨대가 똑 떨어져서 남편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다이소'나 'DC마트'에 들르게 되면 유리빨대를 좀 사다달라고. 지난번 다이소에 들렀을 때 2000원에 판매하던 유리빨대를 본 적이 있거든요. (그때 사왔어야 했는데...)


저의 유리빨대 선언에 남편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합니다. "있으면 사올 게." 꽤 비협조적인 말투. 저는 지구환경을 위해 그리고 우리와 살아가는 생계태의 다른 동물들을 위해서 일회용품 사용은 최대한 줄이기로 결심했습니다.


우선 일회용봉투나 랩은 더이상 사지 않기로 했고 대신 식재료나 반찬을 담을 수 있는 반찬통을 몇 개더 사기로했습니다. 채소는 깨끗이 씻어 커다란 통에 담아 보관하고 육류와 생선도 마찬가지로 소분해서 반찬통에 담아 보관하기 시작했죠.


집에서 커피나 음료를 마실 때도 저는 빨대 없이 그냥 마시는 편인데 꼭 얼음 있는 음료가 문제였지요. 밑바닥에 남아 있는 음료를 먹으려고 컵을 한껏 들어 올리면 음료와 함께 와다다 쏟아져 나오는 얼음들. 어린아이처럼 음료를 흘리는 게 어린아이 같다고 남편이 꼭 일회용 빨대를 꽂아주곤 했습니다.



"난 일회용빨대 안 쓸거야!"

단호하게 말해도 "옷에 묻어서 더러워지잖아." 남편은 본인 컵에 하나, 제 컵에도 일회용빨대를 꼭 챙겨서 가져다 줍니다. 저는 그럴 때마다 "나 하나라도 일회용품 사용을 줄여야 되지 않을까?" 라고 이야기합니다. 한 사람이 평생 사용하는 일회용품, 플라스틱 양을 생각한다면 저 하나라도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죠.


하지만 남편은 "나 하나가 노력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진 않아. 60억명이 쏟아내는 쓰레기에 내가 하나 노력한다고 해서 양이 크게 줄지는 않는다고." 맞받아치는 남편의 대답은 저의 노력에 초를 칩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곧죽어도 일회용빨대를 사용하겠다고 이야기하죠.


콧구멍에 일회용 빨대가 꽂혀 괴로워하던 바다거북이. 쓰레기장에서 음식물쓰레기와 비닐봉투를 먹으며 병을 앓다가 죽게 되는 스리랑카의 플라스틱 코끼리. 비록 남의 나라 이야기라곤 하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제가 봤던 KBS 환경스페셜 '플라스틱 코끼리'

https://www.youtube.com/watch?v=ouruW-J4-0U



남편의 콧구멍에 일회용빨대를 꽂아주고 싶었다.

결국 남편이 사온 빨대는 검은색 일회용빨대. "유리빨대가 없었어?" 나의 질문에 남편은 귀찮은 듯 "응."이라고 대답합니다. 보나마나 유리빨대를 찾아보지도 않았을 거면서. 오늘 할인매장에 간다길래 작은 심부름하나 부탁했더니 이런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결국 저는 갖고 싶었던 유리빨대를 마음 속에 품고 남편 얼굴을 볼 때마다 유리빨대 타령을 했지요. 물론 온라인구매로도 살 수 있었지만 다이소의 2000원이라는 가격은 너무나 매력적이었거든요. 게다가 남편과 오븟하게 손을 잡고 가서 남편의 동의를 받으며 그에게 유리빨대를 전파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유리구두 말고 유리빨대

그렇게 저의 마음 속에 '사고 싶은 물건 1위'로 올라서게 된 유리빨대. 유리구두도 아니고 명품구두도 아닌 유리빨대를 사달라는 건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평소 명품이라곤 갖고 싶어 하지도 않고 사달라는 소리도 안 하는 나같이 착한 와이프에게 유리빨대 하나 못 사줄일인가?


생각해보면 제가 갖고 있는 물건 중에 명품이라고 불릴 물건은 하나도 없습니다. 누구는 100만원짜리 명품가방, 신발, 화장품을 남편에게 선물 받았다 자랑하던데. 제가 갖고 있는 명품이라곤 백화점 세일기간에 산 20만원짜리 핸드백. (참고로 저는 5만원이 넘는 가방을 사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도 남편이 친구 결혼식에 같이 가기 쪽팔린다며 하나 장만해준 것이죠. 저는 비싼 명품보다는 싸고 품질 좋은 물건을 사면 그게 그렇게 기분이 좋더라고요. 제가 추구하는 것은 오로지 실용주의와 가성비. 다이소 같은 할인매장은 저에게 명품 백화점과도 같습니다.



예쁜 나의 명품, 유리빨대

그러다 남편의 휴일. 함께 간 대형쇼핑몰에서 주방용품 할인행사를 하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 저도 어딜가든 할인행사나 이벤트홀은 무조건 가고 봅니다. 구경만 실컷해도 본전, 득템하면 돈을 아끼게 되는 거니까요.


프라이팬과 가득 쌓인 반찬통 사이에서 발견한 유리빨대! "찾았다! 빙고!" 그런데 이게 왠일! 하나에 5400원? 헥! 다이소에서 팔고 있는 2000원 유리빨대에 비해 2배 이상 높은 가격. 저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오늘따라 왠지 협조적으로 나오는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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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김에 하나 사. 내꺼까지 2개 사든가."

헐! 이게 왠일! 실험기구처럼 간지나 보이는 유리빨대에 남편의 마음도 홀린 것인가? "빨대 닦는 청소솔도 들었네. 휴대용 주머니도 있고, 이 빨때는 휘어졌네." 유리빨대를 유심히 살피던 남편도 마음을 홀딱 뺏긴 듯 했죠.


그래, 이 때 아니면 언제 사겠어! 그리고 남편의 마음이 호의적으로 돌아섰을 때 구입해야 남편도 유리빨대를 잘 사용해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큰 맘먹고 2개, 2000원에 계획했던 구입지출이 1만 원을 넘겨 버렸지만 지구환경을 생각하는 유리빨대 사용자 1인을 포섭했다는 뿌듯함에 나름 윤리적 소비를 했다며 위안을 삼았습니다.



남편의 애착빨대? 반려빨대?

"하나는 뜯지 말어. 내가 갖고 다니게." "언제는 일회용빨대만 쓸거라면서!" 두 개다 은근슬쩍 제 것으로 사용하려는 저의 움직임을 남편이 멀리서 지켜보며 한마디합니다. 그래서 하나만 뜯고 하나는 포장도 뜯지 않은채 고이 보관 중인 유리빨대세트.


KakaoTalk_20230216_143329530_16.jpg 왼쪽은 제가 쓰는 것, 오른쪽은 새 걸로 남겨 놓은 남편 것.


"나도 여름이면 밖에서 아메리카노 마실 건데 그때 싸들고 다니면서 쓸거야." 헐랭. 유리빨대 싫다고 할 땐 언제고? 그러면서 저도 내심 뿌듯해하며 한세트는 고이고이 주방서랍에 모셔놓고 있습니다. 그후에도 남편과 홈카페를 할 때는 물론이고 카페에 나가서 차를 마실 때 꼭 이 유리빨대를 가져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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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퍼 주머니에도 쏙 들어가서 항상 이렇게 가지고 다녀요. (오른쪽 사진)


저에겐 그 어떤 명품구두, 동화 속의 유리구두 보다 이 유리빨대가 훨씬 값지고 예쁜 명품이랍니다. 한 사람이 습관만 바꿔도 평생 쓸 일회용품을 줄일 수 있고, 우리 부부 2사람의 몫만 줄여도 그 양은 상당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에게는 문명, 문화라는 것이 있고 이것이 다른 동물들과는 차별화되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작은 습관이 조금씩 번져서 문화가 된다면 바다거북이나 코끼리가 조금 덜 아픈 세상이 오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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