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에게 카레 하나를 끓여 주면서도 왜 이리 더딘걸까? 마음은 급한데 내 손은 맘처럼 빨리 움직여 주지 않는다. 난 손이 느린편이다. 나물반찬은 재료 손질부터 시작하면 기본이 한 시간, 국과 찌개는 그 이상의 시간이 걸릴 때도 있다. 옆에서 남편이 보채지만 않았더라면 더 완벽한 레시피가 나오진 않았을까? 꼼꼼한 성격과 느린 손이 만나 블로그 레시피라도 촬영하는 날에는 보통 요리의 두 배 정도 시간이 걸린다.
기생수가 사는 걸까?
영화 '기생수'처럼 주인공의 손이 되어 살아가는 기생생물이 나에게도 있는 걸까? 급한 마음과는 다르게 손은 느릿느릿 움직인다. 거북이의 혼이 들어갔나? 아니면 나무늘보? 가끔씩 그렇게 느껴질 때도 있다.
#손이 느린 영양사 새댁
레시피로 콘텐츠를 만들어 낸다는 건 손이 느린 나에겐 굉장히 고단한 일이다. 이렇든 저렇든 뭐든지 뚝딱 만들어내는 살림 고수라면 일이 더 쉬울 텐데. 느릿한 손을 덜 원망할 수 있도록 초보 새댁이라는 핑계를 대 줄 시간도 얼마남지 않은 것 같다.
왼손은 핸드폰, 오른 손은 요리.
느린 손에 있어서 제일 조심해야 할 건 불조절이다. 느릿느릿한 손이 강하게 올라오는 불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 하면 재료가 타버리거나 원하는 식감보다 과하게 물러지는 일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요리할 땐 약불이나 중불이하, 강불은 팔팔 끓이거나 아삭한 식감을 살려 강하게 볶아내야 할 때 빼고는 잘 쓰지 않는다. 채소의 생생한 색감이나 영양소 파괴를 막기 위해서라도 시간은 조금 더 걸리지만 약불로 천천히 익혀내는 레시피를 선호한다.
#느림이 알려주는 채소의 단맛
천천히 요리하면서 좋은 점은 양파나 당근처럼 단맛 나는 채소가 자연스럽게 익으면서 채소의 단맛이 충분히 우러나온다는 점이다. 그덕에 설탕이나 물엿, 조청 등 감미료는 잘 사용하지 않는 편이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만든 반찬을 먹으면 정말로 설탕을 넣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단맛이 나냐며 신기해한다.
無설탕 레시피, 감미료가 적게 들어간 레시피들은 모두 다 천천히 움직이는 손 때문에 만들어졌다.
중불과 약불로 요리하면 재료가 익어가는 속도를 살피면서 원하는 식감과 상태에 맞춰 타이밍을 맞출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또한 강불로 요리했을 때 재료들이 이리저리 튀면서 주변이 지저분해지는 것, 몸으로 튀어 올라 화상을 입는 경우도 방지할 수 있다.
느릿느릿한 손은 여러 모로 도움이 된다.
#여유와 시선, 돌아보기
특히 레시피 사진을 찍을 때 느린 손은 진가를 발휘한다. 요리도 천천히 만들면서 그 사이사이에 지저분한 것, 치워야 할 것, 사진에서 필요없는 것들이 한번이라도 더 눈에들어온다. 손을 빨리 움직여서 레시피가 휘리릭 끝나버리면 나중에 사진 한귀퉁이엔 반드시 행주나 키친타월, 눈에 거슬리는 무언가가 발견되기 마련이다.
이것저것 치우면서 레시피를 하다보면 당연히 시간은 더 걸리지만 요리가 끝나고 나서 치울 것 없는 주방을 보면 나름 뿌듯하다. 느린 손은 나에게 주변을 한 번 더 돌아볼 여유와 시선을 갖게 한다.
천천히 디테일을 살려서 해야할 일에 나의 느릿한 손은 속도를 잘 맞춰준다.
사회 생활을 할 때도 이 느림보 손처럼 어긋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미 내 곁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많은 시간을 나에게 할애하며 나의 어그러진 부분을 맞춰주고 있다는 거다.
그렇게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만들어낸 '일상'은 이미 소중하고 값진 성과들이다. 난 내 느림보 손에게 감사해하며 언제가 이 느림보 손을 그리워할 날이 올거라 생각한다. 느림보 손도 초보 새댁을 그리워할 것이다.
카레라는 음식은 참 신기한 요리다. 푹 끓이고 오래 끓일 수록 맛이 더 좋아진다. 특히 채소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단맛은 하루정도 지나면 맛이 더 진해지는데 고기가 없을 수록 그 맛을 더 잘 음미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채식카레만의 매력이다. 고기 대신 완두콩을 넣으면 고소한 맛이 더해지는 데 색감도 예쁘고, 영양소 균형도 잘 맞출 수 있다.
양파, 당근, 감자, 채소에서 나올 수 있는 단맛과 감칠맛, 다채로운 맛이 한데 어우러져 카레향을 입고 나면 이렇게 산뜻하면서 깔끔한 맛이 나올 수가 없다. 카레는 무조건 소고기카레만 찾던 남편도 나의 채식카레에는 대찬성이다.
느린 손이 진가를 발휘하면서 채소에서 나올 수 있는 맛들이 뭉근하게 녹아나오기 때문이다. 우선 채소들을 올리브유에 한번 볶아내는데 여기서부터 카레를 미리 넣고 볶아야 깊이 카레향이 배어든다. 그리고 푹 끓이는 단계에선 반대로 한번 익은 채소들의 다양한 맛이 카레국물에 스며든다.
이 맛은 하루가 지나 더 깊어지는데 아침, 저녁으로 한번씩 푹푹 끓이면서 더 훌륭한 채식카레로 변모하게 된다. 느리면 느릴 수록 맛있는 채식카레. 느림의 미학은 여기에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