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공원 산책을 나갈 때면 오늘은 또 뭐 먹지? 고민하게 됩니다. 공원 단풍을 즐기면서 벤치에 앉아 마시는 커피가 일품이거든요. 하지만 위염 때문에 뭐라도 먹으면서 커피를 마셔야 하는데 집근처엔 비건 카페가 없어서 늘 고민하게 됩니다.
#나는 유제품, 달걀이 왜 싫을까?
사실 전 버터나 우유, 치즈, 달걀이 들어간 빵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첫맛은 그럭저럭 단맛과 고소함에 먹을만한데 뒤에 남는 비릿함과 느끼한 맛이 정말 싫거든요. 휴지로 닦아도 입술 주위를 계속 맴도는 맛. 정말, 말 그대로 심기를 거스르는 불쾌한 맛입니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혀에서 홍시라 하여 홍시라고 말한건데..."라는 대사처럼 혀에서 싫다고 느끼는 건데 저도 그 이유와 원인은 알 수 없습니다. 그냥 제 입맛이 그런가보다 하고 채식지향적인 입맛을 고집하고 있죠. 얼마전부턴 제 혓바닥이 뚜렷한 입맛을 주장하면서 저도 모르게 1일 1채식(비건)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편과 함께 하는 브런치입니다. 아메리카노만 마셔도 되는데 위염이라 빈 속에 커피는 안 되고, 라테는 우유 비린맛이 나서 싫고. 결국 카페에서 디저트 빵을 사게 되지만 역시나 비릿한 버터맛이 입가를 계속 맴돕니다.
#비건이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얼마전 남편과 성수동에 있는 비건 카페를 갔어요. 우유 대신 오트 밀크로 커피와 빵을 만드는 곳이었는데 남편과 저처럼 채식인과 채식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두 이용할 수 있는 카페였습니다. 음료의 반 정도는 식물성 원료로 만들어 'VEGAN(비건)'이라는 표시가 붙어 있었고, 제과, 제빵류도 반 정도는 비건 제품이었죠.
'VEGAN(비건)' 표시를 해놓아 안심하고 골라 먹을 수 있다는 점, 직원 분에게 이것저것 재료를 묻지 않아도 된다는 편안함 그리고 누구든지 비건 메뉴를 체험하고 즐길 수 있어서 채식인들이 눈치 보지 않아도 된다는 점들이 정말 맘에 들었습니다.
제가 시켰던 '오트 아이스크림 라떼'도 오트밀과 커피, 비건 아이스크림으로 만든 건데 고소한 맛과 부드러운 맛, 깔끔함이 좋았어요. 당연히 브런치로 곁들일 수 있는 비건 빵을 몇 가지를 사고 싶었는데 이번엔 가격이 문제였습니다.
#동물성 재료 없이 빵을 만든다는 것
보통 디저트류 보다 살짝 더 비싸다는 느낌? 그리고 귀염귀염한 디저트들이 왜 갑자기 더 작아 보이는 것인지? 성분을 보면 건강을 위해 좋은 재료를 써서 그런가보다 이해는 가지만 선뜻 여러가지를 구매할 가격은 아니었습니다.
당연히 우유, 달걀, 버터 없이 기존의 빵들을 만들어 낸다는 것도 특별한 레시피와 기술력을 필요로하는 작업이죠. 하나의 빵이 완성되기까지 들어간 숱한 노력과 실패들. 어쩌면 저만의 레시피를 만들고, 음식을 많이 경험한 입장에서 이해가 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눈물을 머금고 제일 사고 싶었던 통밀빵 하나를 사오게 됐죠. 가장 건강해보이고, 브런치로 질리지 않는 통밀빵. 원래는 통밀빵이 부석부석하고 거칠한 느낌이 있는데 그런 느낌이 전혀 없었어요. 오트 밀크 때문인지 비린맛 없이 촉촉하고 부드러운 느낌?
재료 함량이나 성분도 몸에 좋은 것들이라 다 맘에 들었는데 역시나 가격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350g에 7000원,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대중적인 통밀식빵이 755g에 3000원 정도인 걸 감안하면 양은 1/2배, 가격은 2배 이상인 셈이죠.
가격과 맛, 모두 괜찮다 싶으면 2~3개 정도 사서 냉동실에 쟁여놀라고 했는데. 비건의 대중화는 아직 먼나라 이야기인가요? 일부러 찾아가야 할 맛과 가격은 솔직히 아니었습니다.
#비건빵은 멀리 있지 않았다.
사실 공원 옆에 자주 가는 빵집이 있어요. 그런데 그곳은 비건 전문 베이커리도 아니고, 더군다나 사장님이 계속 바쁘셔서 재료로 뭐가 들었는지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곤란했어요. 성수동 카페처럼 비건 제품에 표시를 해서 안심하고 고를 수 있는 시스템도 아니었고.
그런데 남편이 공원 벤치에 앉자마자 "난 비건빵 싫어!"를 외치는 겁니다. 오늘 이 브런치를 위해 성수동에서 통밀빵을 사온 건데? 건강해보여 한번 먹어보겠다고 할 땐 언제고? 암튼 저도 비건을 강요하고 싶진 않아서 다른 빵을 사주기로 했죠.
냉큼 지갑을 챙겨서 자주 가는 빵가게로 들어갔습니다. 역시나 오늘도 푸짐한 빵들이 한 가득 쇼케이스를 차지하고 있었죠. "어서오세요." 나름 맛집으로 소문나서 사장님은 빵 채워넣기에 여념이 없었고, 저는 정말 먹음직하게 보이는 바게트 하나를 집어 들었습니다.
#숨은 비건 빵 찾기
남편은 과연 이 빵을 잘 먹을까? 무심결에 집어 든 무화과 바게트. 그 순간 제 뇌리를 스치는 바게트의 재료들! 밀가루, 소금, 물, 이스트! 단 4가지 뿐! 독일에 맥주 순수령이 있다면 프랑스엔 바게트 순수령!
하지만 요즘엔 연유바게트, 마늘버터바게트 등 다른 부재료를 넣는 바람에 비건 빵이란게 무색해지긴 했지만. 잘 찾아보면 비건들을 위한 바게트 하나 정도는 건질 수 있었습니다. 저는 빵을 들자마자 사장님에게 다급하게 물어봤죠. "사장님, 여기에 뭐가 들었나요?" 선뜻 대답하지 못 하는 사장님에게 다시 "비건인가요? 동물성재료는 안 들어갔나요?"라고 묻자 사장님은 그제서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네. 무화과만 추가했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헐. 이런 바게트 맛집을 두고 비건 카페 원정을 다녀왔다니! 바게트마다 차이는 있지만 견과류나 과일이 만 들어간 바게트, 그냥 기본 바게트들도 그제서야 눈에 들어왔어요. 특히나 500g 이상 쯤 되보이는 커다란 바게트가 4000~5000원, 가격표를 보면서 기분이 더 좋아졌답니다.
#당신이 파랑새입니다.
그동안 눈에 들어 오지도 않던 바게트가 왜 이제서야 눈에 들어온 걸까? '비건'이란 의미로 새롭게 다가온 빵 한조각은 마치 동화에 나온 '파랑새'처럼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니, 빵이 새로워진게 아니라 제 생각과 관점이 달라진 것이죠.
늘 곁에 있어서 특별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일 뿐. 특별함은 늘 제 곁에 있었습니다.비단 빵뿐만이 아니라 제 주변의 사람들, 가족, 남편. 누군가의 사랑, 가정의 행복, 건강함. 열 손가락이 온전해서 이렇게 키보드를 치고 있는 것도 정말 감사한 일이라 느껴졌습니다.
비건빵을 찾아 멀리 돌아 온 여정은 결국 특별함은 특별한 곳에 있을 거란 제 고정관념과 어리석음을 확실히 깨주었습니다. '비건'이나 '채식'이 가진 의미는 특별한 것임에는 분명합니다. 나 자신이 아니라 공동체와 미래를 위해 온전한 한 끼를 포기한다는 것. 그것이 가치 있는 것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런 특별한 마음을 간직한 사람은 존중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구라는 별에, 우리의 곁에 소중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 사람들은 언제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소중한 가치를 가진 특별한 존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