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코케이크

14

퇴근 시간대, 지하철 문이 닫히며 사람들 사이의 공간이 더 좁아졌다.


자리에 앉자마자 진동으로 바꿔 둔 휴대폰이 가방 안에서 길게 떨렸고, 연두는 반사적으로 가방 속을 뒤졌다.


지잉- 지잉-


약간의 땀이 배인 손끝이 케이스 모서리를 더듬다가, 핸드폰을 들어올린 순간


[‘고언’]


그의 이름이 화면에 떠올랐다.


‘회사에 있을 시간인데?’


그녀는 한 박자 늦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너, 지금 어디야! 전화를 왜 안 받아!”


귓가를 울리는 지하철 소음 위로 그의 목소리가 칼날처럼 깊게 파고들었다.


연두는 속으로 화를 눌렀다.


“귀청 떨어지겠네, 진짜.”


옆사람들의 눈길에 소근소근 대답했지만 여전히 그의 말투는 찢어지는 억양, 늘 상대의 말을 먼저 무시해버리는 투였다.


“오늘 늦는다고 했잖아. 집안 일도 다 해놓고 나왔는데...이게 이렇게까지 소리 지를 일이야?”


“사진! 네 방, 창문에 붙어 있는 사진! 그게 왜 네 방에 있는건데? 누가 가져가래? 왜 또 남의 물건에 손을 대!”


‘사진?’


연두의 머리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3층 다락방 창문. 유리창에 붙여 둔, 색동저고리와 빨간 한복치마를 입은 자신의 사진.


“고 상무, 지금 내 방에 들어간 거야? 왜?”


“변명하지 말고 설명해! 지금 당장!”


지하철이 터널로 들어가며 객실이 어둡게 변했다. 어둠과 빛의 경계가 연두의 얼굴을 지나갔다.


그녀는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사생활 침해하지 말자고 했던 게 누군데. 1, 2층은 당신, 3층은 내 공간이라면서! 왜 당신이 내 방에 들어가있는데! 고 상무야 말로 지금 계약 위반한 거 아니야?”


“이 사진이! 도대체! 왜! 여기 있냐고!”


그가 말 끝을 잘랐다. 울컥하고 무너지는 목소리가, 분노와 혼란에 차있다는 것을 알려줬다.


연두는 가볍게 눈을 감았다가 뜨며, 조심스레 말했다.


“그거 당신 방 청소하다가...아니, 중요한 건. 고 상무가 먼저 내 사진을 훔쳐갔다는 거 아냐? 내 사진을 왜 당신이 갖고 있냐고! 갖고 싶었으면 말이라도 해야지! 몰래 가져가면 그건 도둑아냐?”


잠깐의 정적. 스피커 너머로 그의 호흡만 들렸다.


“...이게 네 거라고?”


“허! 그 사진, 네 살 생일 때 찍은 사진 이거든요. 색동저고리, 빨간 치마. 그때 머리에 꽂았던 주황색 리본도 옆집 오빠랑 문방구 가서 뽑기로 뽑은 거거든요! 나 다 기억하거든요! 웃기고 있어 진짜.”


뚝-


통화가 끊겼다. 연두는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 도망치 듯 통화를 끊는 그의 감정이 느껴졌다.


‘뭐야. 진짜.’


지하철은 이미 여러 역을 지나왔다.


오래 전 행방이 묘연해진 한 장의 기억. 엄마와 함께 살던 집에서, 고시원으로 나올 때. 또 고언의 집으로 나올 때.


책 사이 어딘가, 너저분한 짐들 사이에 섞여 있었을 사진.


‘고 상무는 왜 그 사진을 가져간걸까?’


**


네 살 연두의 방 안엔 달콤한 생일 노래가 울려 퍼졌다.


초코케이크 위, 네 개의 촛불은 연두의 숨결에 흔들리고, 입술에 어설프게 칠한 엄마의 립스틱은 통통한 볼까지 잔뜩 올라와 있었다.


‘우리 연두, 사랑해!’


필름 사진기는 파란 번개처럼 번쩍였다.


빨간 치마, 색동저고리, 엄마의 화장품을 잔뜩 찍어 바른 눈가와 입술. 그리고 그 때 찍은 두 장의 사진.

한 장은 엄마의 앨범 속에, 한 장은 연두의 작은 액자 속에.


열여섯이 되던 해 부모님이 헤어진 후 그 사진은 더 소중해졌고, 이상하게도 어느 순간엔 기억도 없이 사라졌다.


서랍 속 조용히 치워진 액자는 사진 없이 텅비어 있었다.


사진은 서랍 너머로 넘어갔거나, 먼지 속에 박혀있거나. 혹은 엄마가 발견하곤 연두의 책 사이에 꽂아 넣었을 것이 분명했다.


고시원에서 고언의 집으로 나올 때 이삿짐 어딘가에 딸려 먼지를 흠뻑 맞고 있을 게 확실했다.


‘엄마가 갖다 놓은 건가? 한약 박스에 넣어서?’


연두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어, 우리딸! 왠일로 전화를 다하고.”


“엄마, 그 사진 있잖아. 나 네 살 생일 때.”


“응?”


“아, 왜! 색동저고리에 빨간 한복치마 입고, 엄마 화장품 잔뜩 발라서.”


“아! 어!”


“그 사진 어떻게 됐어? 엄마랑 나랑 한 장씩 가지고 있었잖아.”


“어? 그거?”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엄마가 말을 꺼냈다.


“그거...엄마껀 앨범에는 잘 있는데 왜?”


“알았어.”


이로써 사실이 더 분명해졌다.


고언이 3층 방으로 몰래 들어와 짐 사이에 끼워 둔 자신의 사진을 몰래 가져갔다는 게.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더니.”


**


현관문 센서등이 먼저 켜졌다.


이어 거실 조명을 누르기도 전에, 유리벽 너머 붉은 노을이 쏟아져 들어왔다.


노을은 고언의 하얀 스웨터를 타고 그의 어깨를 붉게 물들였다. 그리고 소파에 앉은 그는 무언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늘 회사 나간다더니 왜 집에...”


“이게...네 사진이라고?”


조명을 켜는 소리에 몸을 일으킨 그가, 3층에서 가져온 사진을 연두의 눈 앞에 밀어붙였다.

고개를 든 그의 눈은 이미 벌겋게 충혈돼 있었다.


“이게 네 사진이냐고!”


“내 사진 가지고 왜 이래? 맞아! 내 꺼야! 네 살 때 찍은 거.”


“거짓말!”


사진을 잡으려 했던 연두의 손끝이 모서리를 스쳤다. 아린 감각과 함께 그의 어깨가 흔들렸다.


“어디서 왔어! 너 누구야! 어디까지 알고 접근한 건데! 나한테 바라는 게 뭐야!”


“고 상무...술 마셨어?”


연두는 한 걸음 물러섰다. 소파 뒤 탁자에 팔꿈치가 걸리면서 그 위에 올려져 있던 도자기가 덜컹 흔들렸다.


“당신 지금...제 정신으로 하는 말 맞아?”


연두의 목소리가 떨렸고, 연두를 지켜보는 고언은 분노와 화를 참지 못했다.


“누가 시켰어! 당장 말해!”


고언의 고함소리와 함께 도자기 깨지는 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울렸다. 층고가 높은 저택 안에서 도자기 깨지는 소리는 마치 천둥소리같았다.


그때, 초인종 소리와 함께 동시에 현관문이 열렸다.


“아가, 우리 아들이랑 며느리가 좋아하는 갈비 싸왔...언아!”


이명희 여사가 현관에서 멈춰셨다. 바닥의 도자기 파편을 보자마자 갖고 온 쇼핑백을 떨어뜨렸다.


“아가! 다친 데는? 피는 안 나니?”


“어머님...”


연두가 입술을 깨물었다. 고언은 엄마의 목소리에도 화를 삼키지 못 했다.


“저 여자...지금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지게 해줘요. 지금, 당장!”


“언아!”


명희가 날카롭게 아들을 불렀다.


“네가 지금 무슨 말 하는지 알아? 그거 무슨 뜻인지...”


그럼에도 그의 어깨가 여전히 떨렸고, 손에는 사진이 구겨질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


“너, 이 집에서 나가. 당장.”


고언의 목소리는 마치 스스로에게도 낯선 음률처럼 들렸다.


연두는 말문이 막혔다.


억울함과 기가 막힘이 한데 뭉쳐 목구멍까지 차오르는데, 그를 바라보는 시어머니의 얼굴에선 아들을 향한 ‘걱정’보다는 ‘공포’라는 단어가 먼저 읽혔다.


이 집의 모든 고성이 결국 연두의 삶을 흔들어놓을 것만 같은 두려움으로 밀려왔다.


“이제 그만 해.”


명희는 낮고 단단하게 말했다.


“아무리 부부싸움이라도 지켜야할 게 있어. 집안이 안팍으로 시끄러운데 너희들이라도 조용해야지.”


그리고 그녀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아가, 당분간은 언이랑 따로 지내는 게 나을 것 같다. 내 카드 줄테니까 오늘은 여기서 자지 말고. W호텔로가. 내 이름으로 예약해 둘게. 회장님도 모르는 내 카드야. 미안하다. 내 잘못이야. 아들 하나 잘 키우지 못 한 내 잘못.”


연두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그녀가 내민 카드를 받았다.


비굴해지고 싶진 않았지만 지금 이렇게 하지 않으면 싸움의 끝이 나지 않을 거란걸 본능적으로 이해했다.

집을 나가는 순간에도 연두의 눈은 사진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가 방금 전까지 쥐고 있던 사진을 조심스레 소파 위에 내려놓는 손짓에선 방금 전과 다른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


비틀거리는 손, 돌이킬 수 없는 걸 건드려 버렸다는 자각.


연두는 현관의 문턱을 넘어서며 다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이곳에 발걸음을 하지 않겠다 생각했다.


철컥-


현관문이 닫히며 잠금장치의 전자음이 들렸다. 대문으로 걸어나가는 사이 무릎이 살짝 풀리고, 손이 계속 떨렸다.


방금 전까지 멱살을 잡혔던 목아래로는 숨이 쉬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다신 오지 않을거야.’


하지만 머릿속에선 사진을 꼭 쥐고 있던 그의 모습이 계속 맴돌았다.


‘왜 가져간 걸까?’


그리고 그 사람은 왜 연두가 훔쳐간거라고 누명을 씌운 걸까? 하지만 그의 눈이 울면서 말했다.


‘난 거짓말하는 게 아냐!’


거짓말이 아니라고 믿고 싶은 사람의 얼굴. 그 사람을 믿게 된다면 세상이 무너질 듯한 진실이 있다는 듯이.


띠링-


마침 휴대폰 알림음이 울렸다.


[CBC 드라마 테스트 영상 확인 요청]


세트장 카메라 감독님이 영상파일 링크를 보냈다. 손끝이 스쳐간 자리는 어느새 테스트 영상을 재생하고 있었다.


화면 속 그녀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대사를 던지는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연두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 남자는 결국, 자신의 상처와 싸우는 사람이야. 내가 쓰다듬고 싶은 얼굴을 하고 있을 때조차.’


침대에 누워 곤히 자고 있던 그날밤, 고언의 얼굴이 떠올랐다.

미워하는 마음과 이해하려는 마음이 겹쳐지듯 아른댔다.


‘공황장애, 이중인격자, 재수, 밥맛...’


첫단추부터 잘 못 끼워진 쇼윈도 커플.


‘계약부부는 오늘로써 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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