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테스트

13

식탁에서 신문을 펼친 채 앉아 있는 고언은 느긋했다.


“어이! 미니언즈. 오늘 어디 나가나 봐? 집안일은 다 해놨어?”


그가 신문 너머로 눈을 마주치며 말을 던졌다.


“미.니.언.즈.”


장난섞인 호칭이 귀에 닿는 순간, 연두의 신경은 더 곤두섰다.


“빨래와 청소는 어제 다 마쳤고, 정원에 물은 다녀와서 줄 수 있잖아. 하루쯤 물 안 준다고 금방 죽지는 않아.”


그녀는 고언이 마실 핸드드립 커피를 내리며 차분히 응수했다. 고언은 다시 신문으로 눈길을 돌렸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예민한거야? 갱년기왔어?”


‘저게! 약속 때문에 바뻐죽겠는데!’


그의 가볍고 싱거운 농담에 연두는 주전자 손잡이를 더 세게 쥐었다.


‘오늘 두 시까지만 참자.’


**


방송국 정문으로 들어서자 바깥과 다른 새로운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 마침 연두에게 다가온 여직원이 밝게 웃으며 물었다.


“혹시...로즈마리님?”


연두가 짧게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로즈마리예요.”


“오늘 아침 전화드렸던 제작지원국 김주희라고 합니다. 어머, 작가님 너무 미인이시다!”


사회생활에 익숙한 듯 멋쩍은 칭찬이었지만, 어쩐지 연두를 향한 진심이 느껴졌다.


“지금 저희 제작지원국에서 투자할 드라마를 물색 중인데, 장 감독님이 마침 작가님 소설을 보고 좋다고 하셨거든요. 사극은 모험이긴한데, 국장님도 참신하다 하시고.”


주희의 설명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층수를 알리는 전광판처럼 또박또박 이어졌다. 연두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런데...제 연락처는 어떻게 아셨어요?”


“지난번 극본 공모전에 ‘왕비를 사랑한 저승사자’ 투고하셨죠? 입상작은 아니었지만, 최종에서 끝까지 거론됐어요. 제작비랑 편성 여건을 따지다보니 오히려 작가님 작품이 눈에 띄었고요.”


그 말에 연두의 심장이 한 번 더 뛰었다.


‘그래도 내 글이 최종까지는 갔구나.’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입술 안쪽에서 작은 미소가 퍼졌다. 문패에 ‘제작지원국’이라 적힌 문이 열리자, 회의테이블과 의자가 보였다.


“국장님, 말씀드린 로즈마리 작가님 오셨어요.”


“아! 마리씨!”


대머리가 번들거리는 중년 남성이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난 표영호 국장이고, 여긴 이번 드라마 맡을 장준 감독.”


검은 티셔츠에 얄팍한 미간 주름, 연두를 쳐다보는 또렷한 시선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장...장준 감독?”


장 감독의 이름을 듣는 순간, 그의 이력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불륜드라마를 격조 있게 끌어올린 사람, 웰메이드의 아이콘! 그 장준 감독님이라니!’


그녀를 바라보던 장준 감독의 첫 말은 정말 뜻밖이었다.


“작가님, 초면에 죄송하지만...살짝 한 바퀴만 돌아보실래요?”


“여기서요?”


“네. 제가 보는 앞에서.”


잠깐 당황스러웠지만 연두는 말없이 일어났다. 회의테이블 앞에서 한 바퀴, 또 한 바퀴.

감독의 시선이 얼굴에서 허리, 발끝까지 갔다가 다시 그녀의 눈으로 돌아왔다.


국장이 마침 눈치를 줬다.


“장 감독, 왜 그래?”


“여주인공 말이에요. 참신한 얼굴이 없어서.”


감독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작가님 페이스, 신선한데...혹시 연기 지도 같은 거...받아본 적 있어요?”


“아...아뇨!”


대학에서 아나운서를 준비했다는 사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조용히 내려갔다.


“내정된 여주가 있긴 한데 너무 뻔해서...이번엔 색다른 인현왕후가 필요한데...”


그의 말투에는 확신이 있었다.


“제가 생각한 이미지와 작가님이 잘 맞아요. 싱크로율 백 퍼센트.”


국장이 놀란 듯 물었다.


“그 정도야?”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완벽 아니면 시작 안 하는 거 아시잖아요. 표 국장님.”


“알지 알지.”


국장은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우리 제작비 탈탈 털어서라도 지원할 게. 그러니까 제발 이번 작품은 우리랑 하자. 응?”


국장의 말을 끊고 장 감독이 결론을 지었다.


“오늘, 작가님 카메라 테스트 한 번 받아보죠? 마침 아래층 세트장도 비어있으니.”


작가로 불려와 배우 테스트를 치른다니, 말도 안 되는 얘기 같았지만 연두는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이건 우연이 아니야. 나에게 문이 열린거야. 고언에게서 탈출할 문이!’


망설임은 짧게 끝났다.


“네. 해볼게요!”


**


장 감독과 대화가 끝나자마자 내려간 세트장은 적당히 어두웠다.

장준 감독은 카메라 감독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온 김에 한 번 봐줘.”


“어디서 데려왔는데?”


“원작 작가. 오늘 계약하러 왔다가 여주로 테스트 한 번 보려고.”


“오!”


카메라 감독이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며 길게 숨을 내뱉었다.


“화면 괜찮은데? 얼굴 비율도 좋고.”


붉은 램프가 켜지며 빨간 점 하나가 눈동자에 들어왔다. 그때, 연두의 가방에서 진동이 울렸다.


지잉- 지잉-


무심코 가방끈을 잡았다가, 감독의 낮은 목소리에 멈췄다.


“마리씨, 여기봐요. 빨간불!”


연두는 고개를 들었다.


‘아나운서 실기시험을 보던 마음으로.’


턱선과 어깨를 사선으로 기울이고, 눈은 카메라에 고정시켰다. 미소를 얇게 떠올린 순간, 카메라 감독이 중얼거렸다.


“요즘 여배우들한테 없는 분위기가 있네. 단아한데 촌스럽지는 않은...약간 고전미랄까?”


장준 감독이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한 번 보자고 그랬지?”


테스트 대본이 건네졌다. 제목은 익숙했다.


‘남편의 외출?’


연두가 가장 좋아했던 드라마. 감독은 페이지를 짚었다.


“195페이지, 씬 13-4. 카페 씬.”


연두의 손끝이 땀으로 촉촉해졌다.


‘연기 지도는 한 번도 받은 적 없는데...’


그러나 페이지를 훑는 순간, 마음 속에 묻어 놨던 오래된 분노가 새삼 선명해졌다.


‘그 얼굴...신.혜.정.’


자신의 삶을 흔들어 놓고도 늦은 새벽 남편에게 전화하던 목소리. 결혼식장에서 안겨 준 모욕. 가슴 속에 분노가 타올랐다.


“시작할게요.”


장 감독의 짧은 지시.

연두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낮고 맑았다.


“아무리 우리가 이혼할 사이라도, 내연녀 주제에 밤늦게 전화하는 건 실례 아니야?”


“그 다음.”


“어디서 까불어? 정말 죽고 싶어?”


“좋아!”


“바람을 피워도 내가 이혼한 후에 하라고! 아직은 내 남편인 거 몰라?”


호흡이 빨라지자, 발음은 더 분명해졌다. 분노의 감정이 문장 끝에서 스르륵 밀려와 입밖으로 던져졌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카메라 감독이 속삭였다.


“발성도 좋고, 오디오 깨끗하고. 억양도 안 튀어.”


장준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페이지를 넘겼다.


“이제 감정을 더 올려서 다음 대사! 속은 뜨겁게, 표정은 얼음 같이!”


연두가 눈꺼풀을 한박자 천천히 느리게 내렸다. 방금 전 분노에 찬 마음을 단번에 얼려버리는 상상. 욕을 내뱉는 대신, 단어 사이에 냉기를 눌러 담았다.


“아무리 내연녀라도 예의는 있어야지. 네가 모르는 사실 하나 알려줄까?”


목소리가 낮아질수록, 말 끝이 더 차갑게 느껴졌다. 감독이 조용히 손가락을 튕겼다.


“좋아! 목소리에서 리듬이 나오네!”


그때 연두의 가방 속에서 진동이 다시 느껴졌다.


지잉-


그녀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감독의 시선이 잠깐 가방을 스쳤다가 다시 연두의 눈으로 돌아왔다.


“괜찮아요?”


“네, 계속할게요.”


대사는 계속 이어졌다. 손의 위치, 얼굴의 각도, 어깨선의 기울기. 연두는 자신이 미처 몰랐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중이었다.


표정을 바꾸지 않고 눈빛만 오열하는 법, 목소리의 끝을 세우는 요령, 입술을 한 박자 늦춰 닫는 타이밍. 누가 따로 가르쳐주지 않았던 것들이, 삶의 흔들림 속에서 이미 체득된 채로 가슴 속에 남아있었다.


‘3년간의 분노가, 하나의 씬으로 응축된 느낌이야.’


자신도 모르게 가슴 속이 뻥뚤리는, 카타르시스 같은 게 느껴졌다.


“컷!”


장 감독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세트장의 침묵 속에서 연두에겐 심장 소리만 크게 들렸다.

카메라 감독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감정 전환이 빨라. 화면 속에서 표정이 오목조목 잘 움직이고. 목소리도 과하지 않고.”


장 감독이 팔짱을 풀며 몇마디 얹었다.


“살을 조금만 더 빼면...아니, 굳이 안 빼도 되겠다. 흔들림 없고 단호한 얼굴라인이 필요하니까.”


연두는 마른침을 삼켰다. 손바닥을 적신 땀방울들이 서서히 식어갈 때쯤 감독이 고개를 들어 정면으로 그녀를 봤다.


“작가님.”


“네?”


“글이 참 좋았어요. 그런데...방금 보니, 쓰는 사람보다 글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해요.”

장 감독의 말을 내뱉는 속도가 아까 전 보다 느려졌다. 그래서 더 진지해보였다.


“여주 후보에 올리고 싶은데...출연 계약은 별개고, 원작 계약부터 먼저 진행할게요.”


그 순간, 세트장의 공기가 달라졌다. 긴장이 설레임으로 바뀌는 순간, 연두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드디어! 그 집에서 벗어날 수 있어!’


가슴이 벅찼다. 그때까지 계속해서 울리던 가방 속 진동이 멈추고 대신 메시지 하나가 화면에 떠 있었다.


[전화해, 지금 당장.]


연두는 조용히 휴대폰을 끄고, 감독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기회를 주셔서.”


테스트가 끝나자 국장이 기다렸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원작 계약서는 우리쪽에서 초안 보낼거예요. 시놉시스 더 가다듬고, 캐릭터 바이블만 간단히 보내줘요. 내일 모레쯤 미팅 한 번 더 하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연두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안쪽에서 심장이 쉴새없이 두근거렸다.



file_00000000e6fc72068f1aa4f569ee2b6e.png


https://brunch.co.kr/@deuny/655



keyword
이전 12화판도라의 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