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야기 빚는 영양사 Aug 23. 2023

권태기의 기준

남편의 반려겨털을 기르고 있다.

당신 참 털털한 여자야.


남편의 저 말은 성격이 좋다는 얘기가 아니었다. 동거를 하고 5년이 지나자 슬슬 결혼 얘기가 나올 때 남편은 나에게 레이저 제모를 권유했다. 일명 피부과에서 해주는 '레이저 전신제모' 서비스. 겨털이나 잔털, 팔이나 다리에 난 쓸떼 없는 털들을 레이저로 영구 제모해주는 그런 서비스였다.

 

 

나에 대한 애정이 식은건가?


"아니! 5년동안 가만있다가! 갑자기 왜?" 발가락에 난 털 하나도 귀엽게 봐주던 사람, 그가 변했다고 생각했다. 언제는 자기 허락없인 몸에 손도 대지 말라며 면도칼때문에 상처나니까 제모도 자주 하지 말라더니. 남편의 애정이 식은건가? 나는 남편에게 권태기가 왔다고 생각했다.



#털털한 부부

남편도 그렇고 우린 평균 이상으로 털이 많다. 남편과의 첫만남에서도 '털' 얘기부터 주고 받았다. 어색하고 할 말없는 소개팅 자리. 나는 야수처럼 털이 덮수룩한 남편의 손을 바라보며 "털이 참 많으시네요!" 라고 운을 띄웠다. 다행히도 남편은 하하 웃으며 "제가 털이 좀 많죠?" 라며 두 손을 내밀었다.

Painted by 이야기 빚는 영양사

엄지 손가락과 손목 사이. 관절이 꺽이는 2군데에 소용돌이처럼 몰아치는 가마가 있었다. 게다가 한 손에 2개씩 총 4개가 있다며 자랑했다. 평소같으면 남의 털이라 더럽다고 질색팔색을 했을 텐데 내 눈에 콩깍지가 씌었던걸까? 나는 남편과 눈물이 날 때까지 크게 한바탕 웃다가 다음 만남을 약속했다.  


그 후로 우리의 연애는 순탄하게 돌아갔고, 나는 남자친구가 된 그를 만나러 갈 때마다 목욕재개하 듯 여성용 면도칼로 온몸을 정리했다. 쪽집게, 여성용 면도칼, 제모용 크림. 안 써본 제품이 없을 정도. 한번은 왁싱제품을 써봤다가 피부에 난리가 나서 한참동안 약을 발라야했다.



#숨겨왔던 털의 비밀

'털 많은 남자가 털털한(?) 여자를 좋아할리는 없겠지?' 그의 털, 한 올까지 사랑했던 나는 애정이 깊어 질 수록 나의 풍성한(?) 털들을 철처히 숨겨야 했다. 연애기간동안 남친에게 들킬새라 부지런히 면도칼 제모를 했고 다행히 남편은 눈치채지 못 했다.


연애가 동거로 바뀌면서 우리의 털들은 일상 속으로 들어와버렸다. 겨울에 내복이 없는 남편을 보면서 몇 벌 사주려했는데 남편은 그런 나를 뜯어 말렸다. 아무리 추워도 내복을 입으면 땀이 뻘뻘난다며. 허벅지부터 발목까지 뒤덮은 엄청난 '자연산 털레깅스'. 그걸로 군대에서 영하 20도의 추위도 견뎌냈다나?


여름엔 모기가 남편 다리에 앉았다가 털 속에 갖혀 그자리에서 죽어버린 안타까운 사고도 있었다. 하체 뿐만이 아니라 발등에 난 털도 나에게 항상 큰 웃음을 준다. 발등언저리 안쪽, 한폭의 동양화에서 나올법한 '난(蘭)'처럼 고고하게 자라난 들은 굳이 다듬어주지 않아도 그 모양 그대로 쭉쭉 잘 자랐다. 희안한 모양때문에 싸우다가도 발만 쳐다보면 웃음이 터졌다.

항상 고생하는 남편의 발은 언제나 사랑스럽다.

털이라면 이를 갈면서 땅에 떨어진 머리카락 한올도 그냥 지나칠 없는 내가. 더럽고 지저분한 건 절대 못 참는 내가! 왜 이렇게 된걸까? 희안한 자리에 희안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도 그게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울 없다. (죄송합니다..ㅠㅠ) 난 아직 콩깍지가 덜 벗겨진게 분명했다. 하지만 남편은 아니었다.



#레이저 공격에서 살아남은 생존모(毛)

동거라는 울타리 안에서 나의 털관리도 느슨해졌고, 털들은 길고 풍성하게 자라 마치 머리카락처럼 길고 두껍게 자라기 시작했다. 한번은 반팔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는데 남편이 머리카락을 떼주겠다며 나의 털을 잡아당겼다. 그런데 그건 그냥 내 팔의 털이었다.


남편이 레이저제모를 권유한 것도 그때였다. 레이저제모는 아프다는 소리에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남편이 먼저 영구 제모를 권하다니. 사랑스럽다던 나의 털들을 영원히 보지 않겠다는 건가? 나는 이렇게 남편의 털을 아끼며 사랑하고 있는데. 섭섭한 마음도 들고 괜한 오기가 나서 당장 피부과를 예약했다.


몇 차례 따가운 시술이 이어졌고, 결국 나는 매끈한 팔다리를 갖게 되었다. 그게 벌써 4년 전 이야기다. 이제는 면도칼 제모가 필요 없을만큼 여름에도 자신있게 민소매와 반바지를 입는다. 아니, 입었었다. 얼마전 겨드랑이 사이에 굵게 피어난 한 가닥 털을 발견하기 전까지.



#남편의 반려겨털

매끈한 오른쪽 겨드랑이 한 가운데, 혼자 우뚝 솟아오른 검은털. 그것도 아주 굵고 튼튼한. 남편은 레이저공격에서 살아 돌아온 귀한 생존겨털이라며 절대로 뽑지 말라고했다. (남편은 스타워즈 시리즈를 좋아해서 레이저나 레이저공격 같은 걸 좋아한다.) 그러면서 내가 반려자이니 나의 겨털 또한 자신의 반려겨털로 삼겠노라고 했다.

 

이 반려겨털은 누구의 털인가?

그 이후 남편은 힘든 일이나 울적한 일이 있을 때마다 내 몸에 있는 반려겨털을 찾았다. 귀한 문화재를 바라보 듯 눈을 반짝거리며 신비하게 웃고 있는 얼굴. 요즘 이것저것 스트레스가 많아 잔뜩 찡그린 얼굴로 마주했었는데...'당신에게 기쁨만 줄 수 있다면.' 나는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기꺼이 내 겨털을 기르기로 했다.


레이저로 밀어버린 활량한 땅에서 찾아낸 오아시스. 그 털 하나를 사랑해주는 남편을 보면서 몇 년간 권태기라고 믿었던 내 생각이 눈 녹듯 사라졌다. 사람이 미우면 털끝 하나까지 다 미워보인다던데. 난 그래서 남편이 나를 미워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끈질기게 살아 돌아온 반려겨털과 함께 남편의 사랑을 믿게 됐다.

 


#그에게 한 올이 소중해진이유

그리고 남편에게 털 한 올도 소중해진 이유가 있다. 40대에 접어든 남편은 시간이 지날 수록 M자 탈모가 심해진다. 몇 년 전만 해도 이렇게까지 머리가 빠지진 않았는데. 아버님이 대머리도 아니시고, 할아버님도 대머리가 아니셨지만 작은 아버님이 대머리시라(증조할아버지나 고조할아버님 쯤 어딘가에 대머리 유전자가 있는 건 아닐까?) 조금은...걱정이 된다.

M자 탈모가 진행 중인 남편의 이마

넓어져가는 이마 때문에 마누라의 한 올 남은 겨털조차 소중해진걸까? 남편은 건강한 내 모발을 보면서 항상 부러워한다. 가늘고 힘없이 축쳐진 자신의 머릿결이 싫다며 나의 긴 머리를 M자 이마에 가져가 올린다. 여보, 걱정하지마.


내 겨털을 뽑아서라도 모발이식 꼭 해줄게. 그날을 위해 당신의 반려겨털은 내가 잘 기르고 있을 게. 걱정하지마. 날 믿어. 난 아직 권태기는 아닌 것 같아.

후원은 저희 남편 탈모에 큰 힘이 됩니다 ♥


콩밥 싫어하는 남편이 콩국수는 엄청 좋아한다. 그래서 실제로 탈모 예방에 좋은 검은콩 국수를 만들어 봤다.

검은콩은 풍부한 단백질과 다양한 무기질, 비타민을 함유하고 있으며 검은색을 띄는 안토시아닌 색소와 다량의 이소플라본 성분은 혈액순환을 개선하고 노화방지에 효과적이다. 특히 이소플라본은 피부를 매끄럽게 함은 물론 골다공증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고 비타민 B1, B12가 풍부하게 들어 있어 실제로 건강한 모발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출처: 우수식재료디렉토리)


검은콩 100g을 5시간 이상 충분히 불려 푹 끓여 준다. 냉장고에서 차갑게 식힌 뒤 잣 20g 넣어서 믹서에 갈면 끝

검은콩을 갈 땐 고소한 견과류를 함께 갈면 맛이 좋은데 1인당 20g, 잣, 땅콩, 검은깨를 넣고 갈아도 맛이 좋다. 꾸덕한 콩국수는 소금보다는 소금물로 간을 하면 간 맞추기가 쉽다.


고체인 소금을 넣다보면 소금 넣었다, 물 넣었다 간 맞추기도 힘든데 소금물을 티스푼으로 한 숟가락씩 넣다보면 입맛에 맞게 간을 맞추면서도 미묘한 차이로 소금을 그래도 조금은 덜 먹게 된다.


콩국수는 소금보다는 소금물로 간 맞추기가 쉽다.


어쨌든 건강한 모발을 유지하려면 몸에 좋은 단백질을 충분히 먹어주는 게 중요한데 이럴 땐 콩국수만한 게 없다. '콩' 자체가 좋은 식품이지만 두피의 혈액순환을 돕고 생리활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여러 비타민, 무기질, 안토시아닌색소가 풍부하게 들어 있기 때문이다.


채식이나 비건에 거부감이 있는 남편이지만 그래도 콩국수는 반가워하면서 뚝딱 그릇을 해치운다. 여름이라는 계절이 우리 부부에게 평화를 찾아주는 이유다. 부디 남편의 콩깍지와 머리가 벗겨지지 않도록 올해도 검은콩 국수를 많이 해줘야겠다.   

구독, 좋아요, 공유는 필수♥ 지금 당장 주변에 공유하셔서 행복과 건강을 나눠주세요~
이전 03화 시부모님을 사랑하는데 10년이 걸렸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