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부모님과 함께한 외식자리. 오리고기 대신 채소 쪽으로 많이 가던 나의 젓가락을 보고 시아버님이 한 말씀하셨다. 어디까지나 1일1채식이고 채식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서 건강을 헤치지 않게 잘 먹고 있다는 말씀을 드려도 매번 못 마땅한 눈치셨다. 시아버님의 의중은 혹여 우리 며느리가 아들의 식탁을 온통 풀떼기로 만들어 놓진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하시는 말씀이란 걸 난 알고 있었다.
아버님~ 아드님 배를 보고 말씀하세용~
"통통!" 나는 남편의 배를 귀엽게 문질거리면서 아버님의 표정을 살폈다. 아이 배 어르는 듯 둥굴게 움직이는 손놀림이 웃겼던건지? 아니면 지난번보다 조금 들어간 남편의 배가 맘에 드신건지? "조금 빠지긴 빠졌네. 허허." 하고 너털웃음을 지으셨다. 거기에 "양배추 많이 맥여라! 양배추! 그거 뱃살이 쏙쏙 빠지더라!" 결혼 전부터 아들의 배를 보며 한숨 짓던 시어머님께서 한마디 거들어 주셨다.
시댁에 보낸 방울토마토 바질 무침
시부모님과 티키타카를 주고 받기까지
10년이 걸렸다. 물론 그동안 나라고 험난한 시월드 생활이 없었겠는가? 결혼전 카톡으로 불쑥 날아든 시어머님의 손주타령부터 남편과의 동거시절 명절마다 시댁에서 눈칫밥 먹으며 친정에서 결혼 승락을 받아오라는 시부모님의 독촉을 받아냈던 일까지. (남편과 나는 혼인신고 전 5년이나 동거를 했는데 친정에서 아무 소식이 없자 마음이 급해지신 시댁 어르신들이 하루 빨리 결혼날짜를 잡으라고 안달볶달 하셨다.)
친정어머니는 예전부터 동거를 해보고 결혼해야한다는 주의셨고 동거 기간이 길어질수록 결혼결심이 섰을 때 그때 얘기하자고 하셨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친정어머니는 하나 뿐이 없는 외동딸을 왠만해선 내주려하지 않으셨고, 엄마들의만의 만남으로 성사됐던 첫 상견례는 우리 엄마의 거절로 파토가 나고 말았다. 그 뒤로 시댁가기가 더 민망해지긴 했지만 그것으로 인해 난 더 얻기 어려운 귀한 며느리, 사위 같은 며느리가 되고 말았다.
사위 같은 며느리
감사하게도 우리 시부모님께서는 쓸떼없이 예의차리거나 권위적인 부모님은 아니셨다. 시장골목에서 30년 동안이나 곱창장사를 하셨고 오가는 손님 중에 젊은 손님도 많아서 감각도 젊으셨다. 시댁 분위기는 수평적인 분위기에 민주적이었으며 내가 처음 인사를 드린 날부터 내 이름을 부르며 편안하게 대해주셨다.
부모님의 말에 부적절한 대답을 하거나 반기를 들면 말대답한다고 혼났던 우리집과는 다르게 시부모님 댁은 다소 언쟁이 있더라도 서로 대화를 주고 받으며 의견을 교환했다. 침묵으로 일관하며 서로의 생각을 모르고 오해만 쌓여간 여느 집과는 다르게 대화도 많고 웃음도 많았다. (다소 언쟁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자식의 의견이 묵살당하는 우리집보다 시댁에서의 남편, 형님(남편의 누나)은 부모님에게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이야기했고, 의견을 논리적으로 개진해나갔다. 이런 흐름을 타고 나도 분위기를 면밀히 살피면서 시부모님께 조분조분 의견을 말씀드리기 시작했다.
처세술이 필요한 건 회사만이 아니다
남편과 형님의 처세술을 보면서 조언을 구했고, 도움을 받으며 험난한 시월드를 헤쳐나갈 여러 방법을 터득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나에게 맞는 방법을 모색하게 됐다. 특히나 형님은 아직 미혼이셔서 시부모님과 같이 지내고 계시는데 하루빨리 결혼하라는 어머님과 아버님의 독촉을 아직도 꿋꿋이 견뎌내고 있다.
남편은 부모님의 말에 자신의 의견을 확실히 개진하되 예의없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유머로 승화시킨다. 어쩔 땐 심하다 싶을 정도로 부모님께 화를 낼 때도 있지만 자신은 어차피 친아들이라 괜찮다면서 며칠이 지난 후엔 아무일 없었던 것처럼 부모님과 통화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랑 친정엄마의 싸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남편과 달리 난 시부모님의 친자식이 아니다. 그래서 조심해야할 건 조심하면서 남편 + 형님의 기교를 섞어 나의 의견을 웃음 속에 담아 시부모님께 살포시 전한다. 옵션으로 콧소리를 장착할 때도 있고, 애기처럼 순수하게 귀여움을 장착하며 '나는 몰라요~' 식으로 승화시킬 때도 있다.
나의 미션은 기분 맞춰드리기
한번은 어머님께 말대답을 했다가 어머님이 삐지셨는데 내가 어린애처럼 "어머님은 삐순이래요~ 삐순이래요~" 하고 놀렸다가 온집안이 웃음바다가 된 적이 있다. 여느 부모님이시면 더 크게 화를 내셨을텐데 어머님이 크게 웃으셔서 그걸로 순간에 마무리가 됐다.
그리고 남편과 형님이 집안 분위기가 험악스럽게 돌아가지 않도록 수습을 잘 해주신다.
처음엔 말대답했다가 어떻하지? 걱정했는데 웃음이라는 포장지에 싸서 드리니 시부모님도 부모님이시라 그저 귀엽게 봐주신다. 어쩔 땐 형님처럼 시부모님 말씀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기 방법을 써야할 때도 있지만 그냥 네, 네 하면서 기분을 잘 맞춰드리면 그것만으로도 좋아하신다.
난 시어른들과 싸우자가 아니라 기분을 잘 맞춰드리는 방법을 터득하면서 사회생활에서 써먹었던 처세술을 시댁에서도 터득한 것 같다.남편은 자신의 이런 기술을 '본능'이라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쌓아 온 생존본능.
그러면서 나에게 "넌 우리집 가서 어른들 기분만 잘 맞춰드려. 그것만으로도 효도하는거야." 라고 이야기했다. 어린 손주들이 할머니집에서 댄쓰만 잘 춰도 효도라했던가? 난 아직까지 아버님 앞에서 '개나리처녀' 노래만 불러도 효도라하신다. 그런데 이걸로 10년을 버텼다. 이 방법도 언제까지 갈지 모르겠지만 작은 것에 예뻐해주시고 귀여워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다.
21세기에 듣기 민망한 단어
효부(孝婦). 지인 중에 한 명은 내가 당뇨이신 시어머니를 위해 레시피를 만든다면서 "효부네! 효부!" 효부라고 격려해주다가 "난 그렇게 하지도 못 하는데." 라고 자신을 한탄하는 말투로 대화를 끝냈다. 나는 솔직히 효부가 아니다. 여느 며느리들처럼 육아맘, 워킹맘이 아니라서 시간 여유가 많으니 레시피를 조금 더 연구하고 시댁에 보내드리는 것 뿐이다. 경제적인 여유가 많아 용돈을 챙겨드리면 좋겠지만 이것도 하지 못 한다.
평소 전화도 자주 드리지 못하고 남편을 통해서 반찬이 오갈 뿐. 명절이나 집안 행사, 부모님 생신처럼 특별한 일이 없으면 자주 찾아 뵙지도 못한다. 그래서 한번 찾아 뵐 때 격하게 땐쑤를 추는 손주처럼 기분을 맞춰드리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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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부모님은 70대에 접어드셨다. 환갑 때 첫인사를 드렸던 어머님은 올해 칠순이 되셨고 아버님은 칠십 중반이 되셨다. 그동안 우리 부부는 동거생활을 마치고 혼인신고를 했으며 코로나 기간에 미뤘던 결혼식을 앞두고 있다. 팽팽하고 반듯했던 아버님의 얼굴엔 주름이 더 깊어졌고 이제는 완연한 할아버지가 되셨다. 반짝반짝 윤기돌던 부모님의 얼굴이 건조한 사막처럼 생기를 잃어갈 땐 정말 속상하고 죄송한 마음 뿐이다.
두 분 생신도 딱 6일차이라 두 번 오라기 미안하다며 한번에 같이 하시던 시부모님. 10년 전 어머님의 환갑 케이크를 사갔던 아들의 여자친구는 이제 조금이나마 시부모님의 기분을 맞출 수 있는 초보 며느리가 됐다. 그런데 그 시간이 10년이나 걸렸다. 70대에 접어든 부모님의 10년이 우리의 10년과 다르단 걸 깨닫는데도 10년이 걸렸다. 시부모님을 사랑하는데도 10년이 걸렸다.
10년 전 과거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제발 시부모님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말고 시간날 때 한번이라도 더 찾아뵙고, 모시고 여행가고, 전화 자주 드리라고 말하고 싶다. 가끔 한달에 한두번 정도지만 시부모님이 궁금해서 알아서 스스로 전화드리는데도 10년이 걸렸다. 나는 효부가 아니다.
다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부디 우리 부모님에게 만큼은 느리게 적용되길 바라면서 오늘도 반찬을 만든다. 양파에는 크롬이 많다. 이 크롬은 인슐린 작용을 촉진해 혈당 조절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거기에 눈에 좋은 안토시아닌 색소가 든 적색양파로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양파초절임을 만든다.
어머님은 보라색을 좋아하신다.
적색양파 300g을 얇게 썰어 소금 4.5g, 식초 2큰술을 넣고 조물락조물락 무치면 맛있는 양파초절임 끝. 반나절만 보관하면 자연스럽게 달큰한 맛이 올라와 밥반찬으로도 좋고 어머님 좋아하시는 쌀국수에 좋은 곁들임이 된다. 비트와 무를 섞어서 채식으로 물김치를 만들었는데 색이 와인 같기도 하고 너무 예쁘다며 맛이 좋다고 하셨다. 이것도 조만간 더 만들어드릴 예정이다. 다행인건 어머님은 채식을 좋아하셔서 채식으로 나와 많은 공감대를 나누고 계시다는거다.
하지만 정작 당뇨를 앓고 계시는 본인의 반찬은 잘 만들어 드시질 못 한다. 집에서는 아버님의 입맛에 맞춰서 맵고, 짜고, 단 음식으로 반찬을 만들고 계시기때문이다. 챙겨야할 건 어머님의 몸인데 엄마는 항상 가족부터 챙긴다. 나는 그런 어머님이 밉고, 걱정되며 그립고, 아프다.
30년 간 시장골목에서 작은 도시락통에 변변찮은 반찬으로 식사를 떼웠을 어머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렇게 식사를 하시다가 당뇨라는 병에 걸린건 아닐까? 부모님은 자식들을 위해 기꺼이 본인의 건강을 희생한다. 아버님은 리비아 공사현장에서 청춘을 바치셨고, 어머님은 그 시간에 장사를 하며 5살, 3살 두 아이를 홀로 키우셨다.
'젊음'이라는 부모님의 통장에서 '건강'이라는 돈을 자식들이 꺼내 쓴 것만 같아 죄스러운 마음이 든다. 나도 어머님의 인생통장에 10년동안 빚지고 살았다. 그래서 반찬으로나마 '건강'이라는 용돈을 넣어드리고 싶다. 나는 지금 어머님의 인생통장에 '건강'을 저금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