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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 빚는 영양사 Sep 04. 2023

마음으로 가는 지름길

Food is the way to go heart


밥정이란 게 있을까?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물었다. 기자시절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점심시간까지 함께 했던 사이는 어느덧 퇴사를 하고서도 '친구'란 이름으로 함께하고 있다. 그때는 취재를 목적으로 외근을 나가서도 항상 출입처에 얼굴을 비추며 홍보팀 사람들과 밥을 먹고 오는 게 일이었다


정이 있어야 밥이 넘어가지


그건 그렇다. 일은 일, 사람은 사람, 밥은 밥. 일에 치일 땐 홀로 편안하게 즐기는 점심시간이야말로 진짜 밥이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아무리 밥 먹는 횟수가 많았다 하더라도 정이 쌓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 반면 진심을 다해 소주잔을 기울이며 얼큰한 국밥에 정을 기울이는 사이가 있다. 친구와 나처럼.




마음과 마음이 만나면


음식으로 마음이 오간다는 것. 함께 음식을 나눠먹는 사이로 '식구(食口)'라는 말이 나왔다는데 '친구(親口)'도 그런 말이 가능할까? 함께 음식을 나눠먹던 사이에서 레시피로 정을 나누는 사이, 친구는 내가 만든 콩나물국이 맛있다면서 순식간에 한그릇을 뚝딱 비웠다.


"우리집에 해장이라도 하러 온게냐?" 친구의 입맛에 맞춰 청양고추를 팍팍 썰어 넣은 칼칼한 콩나물국은 금세 동이나버렸다. "우리 같이 반찬 장사나 할래? 음식은 네가 만들고, 홍보는 내가 하고." 내가 만든 채식김치와 양파절임이 제일 맛있다는 친구는 냉장고를 들여다본 것처럼 얘기했다.


주당인 여자애가 오피스텔에 혼자 살고 있어서 내심 걱정이 되는데 그런 마음을 담아서 반찬 몇가지를 손에 쥐어 보냈다. "술 좀 작작 마셔라. 이제 같이 해장할 사람도 없잖아." 잔소리로 건넨 마지막 인사가 얼마전 남친과 헤어진 날카로운 마음을 쑤셔놓았다.


"너 채식 계속 할거냐? 고기가 싫어졌다니! 혓바닥이 어떻게 된 거 아냐?" 시비조로 말해도 신경질 속에는 걱정이 한가득 들어 있단걸 나는 안다. "고기가 싫어진게 아니라 원래 입맛을 찾아간거야." 1일1채식이라고 잘 알고 있으면서 혹여나 걱정해주는 마음이 고마웠다.


"뭐 영양사니까 오죽하겠어." 친구는 내가 들려준 반찬에 고맙단 말을 저렇게 대신했다.




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


사회생활을 하면서 친구가 되고, 다 큰 어른이 되서도 스스럼 없는 사이가 된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순수한 어린시절엔 놀이터만 가도 친구가 그득했는데. 내 음식에서 맛을 알아 주고 마음을 읽어 준다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음률을 알아주는 친구 사이라는 뜻의 '지음'이 있다면 이건 '지미(知味)'라고 해야할까? 그런데 몇달 전 그런 사람이 또 한명 나타났다.


한 식품회사에서 주최하는 요리대회. 어쭙잖은 실력이지만 영양사라고 어찌저찌 쓴 서류심사가 통과가 된 모양이다. 5월의 따가운 햇살 아래서 몇 백명의 참가자가 가족 단위로 모인 가운데 각팀의 요리실력을 뽐냈다. 나도 나름 건강식이라며 천혜향 넣은 채식김치와 채식김밥, 소고기 없는 들깨미역국을 선보였다.


각계의 유명 셰프님들이 자리를 오가면서 심사를 시작했는데 한 셰프님이 내 김치에 관심을 보이며 질문을 시작했다. "이거 뭐 넣은 거에요?" 나는 젓갈 대신 스리라차소스와 핫소스, 된장을 넣었다고 설명했다. 자신도 미국에서 외국인이 만든 스리라차 김치(?)를 맛본 적이 있는데 그냥 흉내만 낸 정도였다고 한다.


"한 번 맛 볼 수 있을까요?" 순간 긴장과 흥분이 동시에 일었다. '이 대회는 심사위원 분들이 맛을 잘 안 본다던데?' 앞서 리뷰를 몽땅 파헤치고 간 나로서는 음식에 자신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유명 셰프님이 맛 없다고 할까봐 내심 걱정을 했다.




지름길을 통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발효가 없으면 김치가 아니다. 젓갈 대신 국간장과 된장을 섞어 넣으며 마음 속에 다짐한 말이다. 하지만 된장의 쿰쿰한 향이 문제였다. 그래서 하늘이 내린 향기, 천혜향을 넣어 채식김치를 만들었다. 채식으로 전하는 건강함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아름다운 향기로 전해지길 바라면서.



"이 상큼한 맛은 뭐죠?" 천혜향의 '천'자도 꺼내지 않았는데 게다가 아주 조금만 넣었을 뿐인데. 셰프님은 단번에 나의 진심을 눈치채 버렸다. 그리고 마지막 심사 전에 "그 김치 다시 한번 맛 볼 수 없을까요?" 라며 또 내 자리로 오셨다.



다른 음식도 맛보고 싶다며 들깨미역국을 한 숟갈 드시고는 놀란 표정과 함께 "맛이 모두 진짜네요. 잘 먹었습니다."라고 얘기했다. 행사 취지에 맞게 주최측에서 생산한 가공식품을 가능한 많이 써서 요리실력을 뽐내야했던 대회. 나는 알고 있었다.


이미 많은 리뷰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많은 사람들에게 채식의 아름다운 향기를 남기고 싶었다. '조미료나 가공식품 없이 모두 건강식으로 맛을 냈는데 그 맛을 알아주신걸까? 진짜라는 말, 맛에서 진정성이 느껴진다는 말이었겠지?'


결국 상은 못 탔지만 레시피 속에서 마음을 알아봐준 셰프님의 한마디가 나에겐 더욱 값진 상이었다.




누군가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요리


그 뒤로 며칠이 지났다. 내년 요리대회 때는 나도 가공식품을 팍팍 써가며 꼭 상을 타리라고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는데 내 이름으로 우편물 하나가 도착했다. '올게 없는데?'


하지만 우편물을 뜯자마자 이게 왜 왔는지 알 수 있었다. 한국심장재단에서 온 기부금 영수증. 요리대회 참가비 명목으로 냈던 3만원은 심장병에 걸린 어린이들의 후원금으로 쓰인다고 했다. 난 잊고 있었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좋은 마음으로 요리대회에 참가했었단 걸.


그리고 내 요리가 누군가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요리였다면 이왕 만드는 거 건강식으로 만들길 잘했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저염저당에 식물성으로 만든 몸에 좋은 건강식들. 직접 음식을 해줄 순 없어도 어린 아가들이 건강하길 바라는 마음이 레시피에 담겨 전해지길.


그래서 내년에는 아가들 입맛에 맞는, 심장에 좋은 건강식을 만들어 볼 예정이다. 그때도 진심만은 알아봐 주시길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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