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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기 빚는 영양사 Jan 13. 2024

귤이 매웠다.

눈물로 담근 귤주

라이언 취했니?

"맵다. 매워."


양파도 아닌 귤 껍질을 까면서 눈물이 주르르 흐르는 건 왜일까?



얼마전 시댁에서 가져온 귤 한박스. 남편이 차를 끌고 가서 진공쌀통과 찬 몇 가지를 함께 바리바리 싸가지고 왔다.


남편이 자꾸 머리카락이 빠진다고 하니 어머님께서는 전자파 안 나오는 드라이기(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어요...ㅠㅠ) 와 며느리 깔고 자라고 1인 전기장판, 우리 부부 발시렵지 말라고 거실에 까는 카펫트 등등...뭐 거의 이삿집 센터처럼 한살림을 차려주셨다.


남편이 운영하는 가게는 시댁과 우리집 사이. 거의 중간 지점에 있어서 어머님, 아버님은 볼일이 있거나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꼭 아들을 부르곤 하신다.


내가 직접 안 가는 게 어디냐며 남편은 허구한날 반찬 배달에 나선다. 쌀, 잡곡, 김치, 여러 반찬, 식재료 등등 시댁 없으면 거의 굶어 죽을 것 같이 가져다 먹지만 가게가 끝나고 피곤한데 부모님이 자꾸 부른다는 남편의 투정은 내가 다 받아줘야한다.


요즘같이 물가가 오르는 불경기엔 정말 감사한 일이다. 그리고 여기엔 부모님께서 맛있는 음식을 아들, 며느리에게 먹이고 싶은 마음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음식을 거절하면 부모님이 속상해하실까봐 남편에게 사양말고 제깍제깍 받아오라는 편이다.


그런데 요즘들어서 반찬 외에도 남편이 가져오는 살림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도마, 그릇, 칼, 냄비, 프라이팬 등 주방기구. 얼굴이 작아진다는 돌돌이(?) 맛사지기, 세탁세제 4통, 울샴푸, 금전수 외 화분 등등.


남편의 말인 즉슨 시부모님께서 이런 물건들을 거실에 쌓아놓고 아들이 오길 기다리신다는 거다. 작년 10월 결혼식을 올린 이후 뭐 하나라도 더 챙겨주시려고 아들을 더 자주 부르시고 정말 기둥뿌리라도 뽑아주실 것처럼 상당한(?) 양의 살림을 챙겨주신다.


이제 반찬과 식재료를 넘어서 거대한 물건들이 왔다갔다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우리집에도 둘 곳이 없다는 거다. 20kg이 넘는 무거운 쌀통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자리를 잡다가 갑자기 짜증이 팍 나기 시작했다.


진공 쌀통에 쌀을 한가득 담아 보내주신 우리 어머님 정말 쎈쑤쟁이~


그런데 남편이 처음 반찬을 받아올 때도 그랬다. 이것저것 식재료를 챙겨주시면 처음엔 화도 나고 짜증도 많이 났다. 이미 냉장고에 우리 부부 먹으려고 내가 만든 반찬과 사다놓은 채소들은 어떻하라고? 이런 걸 무작정 보내주시는 건지? 게다가 챙겨주신 반찬은 넣을 곳이 없어서, 냉장고 정리를 다시 해야하고...


시댁에서 반찬과 식재료를 주시면 정리하는데만도 거의 1시간 이상이 걸렸다. 이 과정이 너무나 힘들고 귀찮아 남편에게 제발 시댁에 가지 말라고 사정사정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10년이 지나면서 내가 음식을 해먹고 남편도 해먹이다 보니 이제는 어머님의 수고스러움을 조금이나마 알겠다. 나물 한 가지 만들더라도 채소를 2~3번 씻는데만 시간이 오래걸린다. 그것도 흙을 씹지 않으려면 눈을 부릅뜨고 꼼꼼히 식재료에 집중해서 씻어야한다. 볶고 지지고, 양념하고. 반찬 몇가지만 해도 발바닥, 다리, 허리가 쑤시고 아프다.


결국 감사하게도 식비 절약하며 우리 부부가 잘 챙겨먹었지만 처음에는 왜 그렇게 짜증을 내고 화를 냈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그저 반찬 만드는데 드는 노력과 시간, 수고스러움을 고스란히 감당하셨을 어머님 생각만 드는데.



이번에도 망가진 귤을 골라내면서 울컥 짜증이 났다. 제주도에 사신다는 아버님 지인 분이 너무 꾹꾹 눌러 담아주신 탓에 터진 귤도 많았고 간혹 구석에서 곰팡이가 난 귤도 있었다. 이럴 경우 그 주위의 귤도 골라내어 먹지 않는 게 좋다.


곰팡이 포자는 눈에 보이지 않거니와 이미 다른 부분으로 퍼져 있는 경우가 많아서 곰팡이가 난 음식은 왠만하면 골라내지 않고 싸그리 버리는 게 좋다.


하지만 저 귤 한박스를 고스란히 버릴 수는 없었다. 우리 먹으라고 주신 귤인데 시부모님 마음을 생각하면 그대로 버릴 수는 없었다. 터진 귤은 골라내고 왠만하면 곰팡이 곳에서 멀리 떨어진 귤만 추스려서 물로 한번 씻어내고 껍질을 벗겨 술로 담궜다.


이 과정을 하루종일 했다. 그리고 너무 힘들어서 처음 반찬을 받아오던 날처럼 남편에게 시댁에 가지말라고 소리를 질렀다. 챙겨주시고 가져다 먹는 일은 항상 감사한 일이지만 그걸 받아내는 것도 힘들 때가 많다.


우리는 10년동안 2번 이사를 했다. 동거 5년 만에 반지하를 탈출해 빌라에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집들이를 했다. 그날 어머님께서 오셔서 슬며시 냉장고를 들여다 보시고는 그때부터 식재료는 깨끗이 씻어서, 혹은 밀키트처럼 만들어 주신다.


대파도 손질대파처럼 깨끗이 손질해서 적당한 길이로 잘라 보내주신다. 내가 좋아하는 우거지 국거리도 소고기 국거리와 깨끗이 손질한 우거지 (돌이 안 나오게 아버님께서 2~3번 씻어주신다고 했다), 간마늘을 일회용 비닐팩에 담아 납작하게 만들어 냉동실에 보관하기 좋게 만들어 주신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제주에서 온 귤은 만신창이. 카펫은 무엇이며? 또 진공 쌀통은 좁은 주방엔 둘 곳이 없었다. 양념통이 든 씽크대 앞 하단 부분에 두면 씽크대 문이 열리지 않았다. 이건 무엇? 또 짜증이 팍 났다. 남편에게 디립다 화를 퍼붓고 신경질이 나서 한바탕 싸움을 했다.



씩씩거리며 귤은 꼴도 보기 싫다며 귤주 만드는 걸 잠시 중단했다. 남편은 그 와중에도 열심히 귤껍질을 까고 있었다. 더 신경질나게...그리고 갑자기 남편에게 걸려온 전화. 어머님이셨다. 절묘한 순간, 절묘한 타이밍.


남편은 전화를 끊고 내게 말했다. "일주일 뒤면 네 생일이라 엄마가 나한테 용돈 부쳐주셨어. 너 주라고, 20만 원." 어머님은 항상 나에게 직접 전하지 않으시고 아들을 통해 슬며시 용돈을 전해주곤 하신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시장골목에서 장사하시기가 여간 힘드신 게 아닐텐데 거기에다 20만 원이라는 금액은 적은 금액이 아니다.


어머님은 10년 동안 내가 남편과 동거를 할 때도, 혼인신고 전에도, 결혼식을 한 이후에도 변함없이 내 생일을 챙겨주신다.


하는 것도 없는 며느리가 뭐가 예쁘다고 10년 동안이나 생일에 용돈을 부쳐주셨을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환갑 때 뵌 어머님의 얼굴이 스쳐지나가면서 나라면 과연? 10년 동안이나 누군가에게 이렇게 꾸준히, 변함없이 애정을 쏟아부을 수 있을까? 생각이들었다. 그저 죄송스럽고 부끄러울 따름이다.


그래서 어머님께 전화를 걸었다. "어머님, 감사해요."라는 말과 함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말을 이을 수 없어서 전화기를 남편에게 떠넘겼다. 남편의 눈시울도 붉어져있었다. 시부모님께서 정성스럽게 챙겨주셨던 것들을 귀찮다고 마다했던 내가 미웠다.

無설탕 귤주 (어머님 맛보시라고 설탕 대신 중간과 맨 위에 레몬을 넣어 부패를 방지했다.)


누구는 나더러 효부라고 하지만 난 효부도 아니고 잘 하는 며느리도 아니다. 어머님이 잘 해주시는 거다. 그리고 남편이 옆에서 잘 도와주고 있다. 나도 다른 며느리들과 똑같다. 똑같이 시댁 문제로 남편에게 화도 내고 시댁에 짜증이 날 때도 있고, 시부모님이 어려울 때도 있다.


물론 서로 감정이 상하고 속상할 때도 있다. 하지만 항상 먼저 안아 주시는 건 우리 어머님이다. 어머님은 엄마다. 난 그후로 남편과 눈물로 귤주를 담궜다.


"귤이 맵네. 양파도 아니고." 이런 저런 핑계를 대보지만 눈물이 왜 흐르는지 우린 서로 잘 알고 있었다. 10년 동안 차곡차곡 베풀어주신 어머님의 사랑을 나는 먹기만 했다. 그래서 눈물로 귤주를 담근다. 귤주는 잘 뒀다가 설날 시댁에서 개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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