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득 찬 냉장고는 조금 어색해

사실 다 이렇게 먹으려고 아등바등 사는건데 말이지

by 자몽맛탄산수

자취생에게 냉장고란 뭘까? 맥주 창고? 과일 보관함? 식수 저장소? 마스크팩 보냉함?

벌써 자취가 6년 째지만, 우리집 냉장고는 한번도 제 기능을 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이대 근처에 살았을 땐, 엄마가 해준 반찬을 먹을 시간도 생각도 없어 상할 때까지 보관하던 반찬 창고였고(끝끝내 엄마의 반찬 제조 의지를 꺾게 만들었더랬다. 엄마 미안해요)

설입 근처에 살았을 땐, 같이 살던 후배와 나란히 누워 붙이던 마스크팩과 스킨 로션 보관함이었고

왕십리 근처에 살고있는 지금은, 방울토마토 혹은 탄산수 보관함이 되어버린 우리집 냉장고.



제주도 파견이 결정되면서 나의 예상을 빗겨나간 사실이 하나 있었다. 작년에 제주도를 다녀오셨던 제주도 전파자 분들이 들뜬 목소리로 설파하던 파견의 가장 큰 메리트는 숙소였는데, 출근시간을 1분으로 뽀개버리는 아늑한 1인실에, 이모님들이 빨래/청소도 다 해주시는 그런 방이었기 때문. 하지만 1년 새 사내 규정은 바뀌었고, 장기 파견자인 우리 팀은 시내 아파트에 배정됐다.


그렇게 나는, 사수님과 단 둘이 널찍한 아파트에 살게 됐다.
누군가와 함께 부대끼며 산다는 것이, 조금 두렵고 조금 더 많이 설렜다.


하지만 하나 걸렸던 것이 있었으니. 사수님은 요리를 매우 좋아하시는 반면, 나에게 요리란 전자렌지 돌리고 뜨거운 물 붓는 것이 다라는 사실. 제주도에서 무엇을 먹고 살까 식단을 짜며 들떠있는 사수님의 모습은, 뭐랄까, 좋으면서도 심리적으로는 약간 부담스러웠다.


식당이나 편의점에서 쉽게 사먹을 수 있는 그런 모두를 위한 한 끼가 아닌,

나와 사수님만의 단란하고 따뜻한 한 끼를 먹을 수 있다는 건 물론 굉장히 좋은 일이지만,

메뉴를 고민하고 재료를 준비하는 일이, 나에게는 추가적인 노동, 혹은 일처럼 느껴졌다.


나에게 일은 곧 시간을 쓰는 것인데, 나는 '먹는 것'에 그다지 많은 시간이나 노력을 쏟는 편이 아니다. 음식 재료를 준비하는 것부터 설거지를 하는 것까지, 일련의 과정이 눈앞에 그려지는데, 와- 재밌겠다! 라는 생각이 앞서기 보다는 와- 시간 많이 들겠다,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할 것도 많은데, 밖에 나가서 사먹는게 더 빠르고 편하지 않나.

겨우 6주를 위해 그 많은 것들을 준비해야 한다니.

저녁 많이 먹으면 살 찔텐데.


사수님과 나의 장바구니 리스트가 점점 늘어날수록, 나에겐 살던 대로 살고 싶은 관성 혹은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는 것에 시간을 쏟아야 하는 아까운 마음, 뭐 그런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더랬다.



제주에 오자마자 먼지 쌓인 집을 대청소하고, 이내 연속 3일 내내 마트에 들러 장을 봤다. 뭐 하나를 사면 다른거 하나를 빼먹고, 메뉴가 추가되면 또 그에 맞는 재료가 필요하고. 마트도 모자라 다이소까지 털었다. 각종 조미료와 양념, 찌개를 위해 작은 뚝배기, 심지어 발 깔개는 4개씩이나 샀다. 내 자취방에 들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녀석들이 영수증에 줄줄이 찍혀 나왔다. 그 큰 냉장고가 어느새 꽉꽉 들어찼고, 집은 조금 화사해졌다.


그 덕에 그 휑했던 아파트가 조금은 사람 냄새 나는 공간이 됐다.

내 자취방보다 훨씬 더.


어느새 목요일, 첫 집 밥 개시.

첫 메뉴는 사수님의 어머니가 정성스레 싸주신 고추장 불고기였다. 나의 몫은 쌈채소를 씻고 식탁을 세팅하는 것. 후다닥, 빨리 해놓고 쉴거야, 나는 빠르게 손을 놀리고는 잽싸게 식탁에 앉았다. 그리곤 고기를 볶는 사수님의 분주한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묘하게 어릴 적 식탁에 앉아 지켜보던 엄마의 뒷모습이 겹쳐졌다. 순간 왠지 모르게 마음이 저릿했다. 아, 집밥, 이런거였지.


사수님과 머리를 맞대고 한숟갈, 두숟갈 밥그릇을 비우고 볼록 나온 배를 땅땅 튕기며 소소한 수다를 떨다가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하며 수세미를 집어드는데, 콧노래가 나왔다. 기분이 참 좋았고, 몸이 참 따뜻했다. 그동안 마음 속으로 혼자 툴툴대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한 끼 식사마저 온전히 즐기지 못할 정도로, 나 되게 팍팍해져 있었구나.
현재에 충실하자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니면서도 정작 스스로는 되게 옭아매고 있었구나.
냉장고만 비어있던게 아니라, 내 여유도 그만큼 텅텅 비어있었구나.
사실, 내가 아끼고 아껴 마지막으로 시간을 쏟을 곳은, 이렇게 행복한 한 끼 식사일텐데.


현재를 충만하게 살아가는건 사실 그렇게 어렵지 않은걸.

그 사실을 소소하게 깨우쳐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참 축복이고 행복이다.

사수님이라서, 더 좋고.


아직도 장보는 게 조금은 귀찮고, 오늘은 대충 사먹을까요? 라는 말이 목구멍에 걸려있긴 하지만,

식단표를 보며 내일 뭐먹지, 고민하는 사수님의 모습에 100% 공감할 수는 없지만,


이 따뜻하고 온전한,

우리만의 공간에서 우리만이 맛 볼 수 있는

이 한 끼 식사를 천천히 음미해보련다.


파견이 끝날 즈음에는,

사수님 손 하나 까딱하지 않으시고도 나 혼자 뚝딱 한 상 차려볼 수 있을까?


20170526_002043.jpg 고추장 불고기, 그리고 치즈계란찜
20170526_193254.jpg 바질페스토파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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