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더 알찰 수는 없어
서울에 있을 땐 하루에 한두마디 나누기도 어렵던 분들과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 자연스레 농담을 건네고 장난을 치게 된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서로에게 조금의 관심을 갖게 됐다. 나도 그들에게, 그들도 나에게. 서울에선 체할 것 같았던 침묵도 조금 편해졌다. 얼마나 함께 일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실없이 웃다가도, 덜컥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도 하나의 소중한 인연이라 생각하면, 나의 첫 직장 선배님들이라 생각하면, 오바스러울 만큼 소중하게 느껴지는데, 이게 사회 초년생의 마음인가 싶다.
토요일 비행기로 제주에 내려왔기 때문에 사실 내려온 그 날이 첫 주말이다. 하지만 청소와 빨래와 장보기로 심신이 지쳤었기에, 주말이라는 꿀 떨어지는 말을 붙여줄 수가 없다. 진정한 첫 주말은 그 다음 주라고 칭하기로 마음대로 결정한다.
첫 주말은 다같이 차를 빌렸다. 나이가 제일 많지만, 가장 동안인 팀원분이 아침 일찍 차를 빌려오셨다. 대한민국을 풍미한 곡들이라면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그의 주크박스를 들으며, 신나게 도로를 달렸다. 아- 이렇게 자유로운 제주는 처음이어라.
아직 수국이 피지 않은 꽃 길을 보며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성산일출봉 근처의 해변에 도착했다. 제주 바다는 정말 물이 맑다. 바닥이 그대로 보이는 바닷물을 보며, 마음이 투명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은 딱딱한 해변에 푹푹 패인 말의 흔적을 따라 걷다보니, 저 멀리 말이 보였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그들은 선수인 것 같았다.
사수님은 나를 정말 잘 챙겨주신다. 같은 학교, 같은 학과라는 공통점이 있어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지만, 그것 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한 세세한 배려와 챙김이 습관이 되신 분이라는 것을 자주 느낀다. 점심으로 갈치 조림을 먹고 다시 차를 타고 달려 표선해비치해변에 내렸다. 차를 내리자마자 귤을 가득 쌓은 트럭이 눈에 들어왔고, 나도 모르게 '아- 귤 먹고 싶다'라고 내뱉어버렸다. 사수님은 사소한 내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귤을 사셨다. 가끔은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부족해 다른 표현 수단을 찾고 싶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감정적으로나, 사회적인 지위적으로나. 쨌든 귤은 정말 맛있었다. 귤의 과즙은 참 넉넉했고(이것이 제주의 진정한 인심인가!), 우리는 정신없이 귤을 까먹은 뒤에 끈적해진 손을 씻으러 화장실에 갔다.
여유, 여유, 그리고 또 여유. 제주에서 가장 좋은 점은 여유가 많다는 점이다. 출퇴근 길이 짧고 쉬워져 내가 온전히 나의 것으로 쓸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이 늘어나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계속해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심리적인 압박이 줄어들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이렇게나 중요하다는 것을 또 한번 느낀다.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 틈에 있다보면, 나도 덩달아 바빠야만 할 것 같고, 하나라도 더 알아야 하고, 하나라도 더 배워야 하고, 하나라도 더 이뤄야 할 것 같은 무언의 압박을 받고 한다. 그래서 도대체 이걸 다 읽고 보고 듣고 씹고 뜯고 맛봐서 뭘 할건데? 라는 궁극적인 목표도 모른 채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 게 어느새 관성이 된다.
요 며칠 조용한 제주에 있다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쉴새없이 뱉어내는 수많은 이슈들, 지식들, 말들. 꼭 지금 당장 알아야 하는건 아닌데. 꼭 빠르게 달려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걸 다 알아야만 하는 것도 아닌데. 하루 정도는 우연히 꽂힌 책에 푹 빠져 보낼 수도 있고, 또 하루 정도는 예능을 틀어놓고 맥주 한 캔에 스르륵 잠들어도 되고, 또 하루 정도는 보고싶었던 영화를 보며 생각 많은 밤을 보낼 수도 있는건데. 한 시간 정도, 하루 정도, 이틀 정도 조금 늦더라도 천천히 나의 페이스에 맞춰서 알아가면 되는건데. 제주가 나의 삶의 터전이 아니라는 이방인으로서의 태도도 어느정도 반영된 생각의 결과겠지만, 나의 일상에 근근히 쉼표를 주고 생각할 시간을 주는 일, 가치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탁 트인 바다의 잔 물결처럼, 나의 머리도 생각도 마음도 크고 고요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행의 별미는 당연히 먹방. 바다 구경을 실컷 한 뒤에는 쇠소깍 근처의 테라로사에 내렸다. 원래 쇠소깍에서 투명 카약을 타려는 희망에 부풀어있던 나였는데, 몇달 전부터 허가를 받지 못해 기약없는 중단에 들어갔다고 한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허브향 가득한 테라로사에서 커피 한 잔, 티라미수 한 입의 여유를 즐겼다.
저녁은 사수님이 완전 추천하신 <기억나는 집>. 해물탕 전문이었는데, 오분자기를 저렇게 산처럼 쌓아준다. 해물탕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정말 맛있게 먹었다. 감칠맛 나는 땅콩 막걸리까지- 훌륭한 집이었다. 이름 값 하는 집, 재방문 의사 200%다.
먹고, 마시고, 읽고, 걸었던 하루.
웃음이 끊이질 않았던 하루.
오랜만에 걱정없었던 하루.
사람들이 제주를 찾는 이유가 이런걸까 싶다.
다음 주말엔 또 어딜 가보게 될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