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기만 하면 재미없잖아
화요일은 현충일, 목요일은 회식, 금요일은 외식, 토요일은 여행, 일요일은 새로운 손님까지. 한 곳이라도 구멍난 주는 왠지 모르게 허파에 간질간질한 바람을 불어댄다.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던 지난 주. 지금 기록하는 건 놀고 먹은 것들 뿐이지만, 9-6 근로시간 잘 지켜가며 열심히 일도 했다. 바람이 빠방-하게 부푼 기억들은 언제 어떻게 날아가버릴지 모르니까 먼저 기록해두기로 한다.
제주의 날씨는 참 변덕스러워 일기 예보가 종종 틀려먹는다. 비가 온다더니, 흐리기만 하고. 비가 온다더니, 맑기만 하고. 맑다더니,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도 하고. 츤데레같은 제주도 날씨. 그래도 그 덕(?)에 평소엔 신경도 안쓰던 날씨를 뜻밖의 행운이나 뜻밖의 불행으로 느끼게 된다. 이제 좀 루틴해질 법한 일상에 간간한 자극이 되는 것 같기도. 아직 태풍이 오진 않았으니, 귀엽게 봐줄게. 지금 부는 바람 세기만 봐도, 태풍이 벌써 무섭다.
무거버거(조천) ▶ 비자림(평대리) ▶ 당군카페(함덕) ▶ 조천 저녁식사
첫 휴일은 아니지만, 사수님과 나 단 둘이서 다니는 첫 여행이라 왠지 모르게 설레였다. 항상 뒷자석에만 앉던 사수님과 나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당당히 운전석과 조수석을 꿰찬 사수님과 나. 사실 면허는 내가 더 오래됐지만, 장롱 면허의 연차가 무슨 의미일꼬. 운전 면허를 딴 순간부터 핸들을 놓은 나는 그저 조수석에 앉아 네비를 해석할 뿐. 초보자들에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씨, 우리의 목적지는 요즘 핫하다는 조천/함덕이었다.
음식에 대한 욕심이 별로 없어서인지, 나는 여행을 갈 때도 맛집보다는 볼 거리나 즐길 거리를 더 중점적으로 찾는 편이다. 예전에 다이어트 했던 때의 습관이 남아있어서인 것 같기도 하고. 물론 그때의 몸은 온데간데 없다만... 무튼 나는 밖에서 사먹는 한 끼 식사에 100% 만족하는 경우가 꽤 드물고 그래서 늘 가던 곳만 가는 편인데, 제주에서는 맛집에 빠삭하신(!) 사수님 덕분에 눈호강 입호강에 덤으로 살까지 얻어가는 중이다.
비바람을 뚫고 도착한 무거버거. 주차 하고 가게 입구로 걸어들어오기까지, 우산이 무려 두 번이나 뒤집혔다. 제주가 썽낼 땐 정말 무섭구나. 외부 벤치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먹는 것을 기대하고 왔건만, 비가 와서 모두 무용지물이 되었다. 실내 좌석이 몇 없었기에, 40여분을 기다린 후에야 버거 세트를 영접할 수 있었다. 버거 종류는 당근/양파/시금치가 있고, 촉촉 바삭한 감자튀김까지 세트로 9,500원. 버거 빵을 직접 만드는데, 당근 맛은 주황색, 양파 맛은 베이지색, 시금치 맛은 연두색이다. 빵은 폭신폭신, 패티는 육즙 가득, 감자 튀김은 적당히 짭쪼름. 휴일을 여는 한끼 식사로 제격이었다. 실내 좌석이 좀 불편했던게 단점이라면 단점. 날씨 맑을 때 꼭 다시 와보고 싶어졌다.
제주도는 시내만 조금 벗어나면 정말 무서우리만치 차가 없다. 속도감을 즐기며 뻥 뚫린 도로를 달려 비자림에 갔다. 제주도에 왔어도 하루의 대부분을 사무실에 앉아서 보내니, 사수님과 나 둘다 자연 속에서 여유를 만끽하고 싶은 욕구가 강해져 있었다. 사려니 숲길과 비자림 사이에서 고민하다, 울창한 비자나무가 비를 조금이나마 가려주겠거니 싶어 비자림을 택했다. 비자림은 울창한 숲/정글의 느낌이라면, 사려니 숲길은 나무들이 미친듯히 수직으로 뻗어있는 다소 이국적인 느낌이라고.
비자나무는 그 이파리가 '아닐 비(非)'자와 비슷하게 생겼다 하여 비자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아닐 비 모양의 이파리들이 얽히고 설켜 마치 하나의 정글을 걷는 듯한 기분이었다. 산책로 곳곳에 배어있는 피톤치드 가득한 그 향기는, 마치 방향제나 디퓨저로 맡아봤음직한 어떤 향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그것보다는 묘하게 생기가 도는 그런 향기였다. 킁킁, 정말 이게 자연에서 나는 향이라니, 많이 마셔둬야겠다는 욕심에 감탄사도 아꼈던 시간. 비가 와서 걷기에는 조금 불편했지만, 비가 왔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그 깨끗한 공기와 내음은 정말 최고였다. 제주에 왔는데 비가 온다면, 무조건 비자림은 베이스로 추천. 걸음이 빠른 사수님과 나는 한시간도 채 안되 돌파한 짧은 산책로였지만, 그 여운이 참 길게 남았다. 조금 덜 추웠다면 두 바퀴는 돌 수 있었을 텐데.
사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요즘 카페는 함덕 근처가 핫하다고. 아직 너무 알려지진 않았지만, 조금씩 생기가 돌기 시작하는 그런 단계. 거스를 수 없는 젠트리피케이션의 파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직은 평온한 그런 상태. 차를 타고 돌아다니다보면 제주 곳곳에 쇼핑몰, 호텔, 테마파크가 공사중인 곳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한 10년 뒤, 아니 5년 뒤에도 제주는 이렇게 조용하고 평온할까. 문득 두려워졌다.
사수님께서 원래 가보고 싶어하셨던 동백과 세바가 모두 문을 닫아서, 후순위였던 당군카페를 찾았다. 이집트 내음을 풍기는 소품이 곳곳에 자리잡은 작은 카페. 긴 테이블이 중앙에 있다. 따로 떨어진 좌석이라고 하면, 음료 제조 과정을 눈 앞에서 볼 수 있는, 주인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놓여있는 테이블 하나 뿐. 당근 티라미수가 궁금했지만 너무 당근당근당근 할 수 없어서 당근당근딸기로 주문. 당근 주스는 담백한 당근의 맛이었고, 당근 밀크쉐이크는 적절히 달달하고 부드러운 맛이었고, 딸기 티라미슈는 새콤한 과육과 달콤한 우유 크림이 어우러진 조화로운 맛이었다. 세 개 다 대만족이었다. 알고보니 이 쪽이 원래 당근이 유명하다고 한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맛있으면 쓰나- 여기도 당근 티라미수 먹으러 한번 더 와야겠다고 다짐. 사장님의 수더분한 미소가 기억에 남는 집이었다.
저녁엔 식사 초대를 받았다. 사수님의 지인 분들이신데, 결혼하고 제주에 내려와 살기로 결심하셨다고 한다. 아직 채 반년이 지나지 않은, 제주도 새내기 분들. 넉넉한 인심에 해산물부터 고기, 후식까지 풀코스로 대접받았다. 사람을 많이 만나는 사람 옆에 있으면, 좋은 사람들도 덩달아 많이 만나게 된다.
벌써 인턴이 6개월째. 고정된 자리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다가 이렇게 한숨 돌리는 날이면, 그렇게 사무실이 싫고 답답하게 느껴진다. 아직 내 나이는 고작 스물 여섯일 뿐인데. 아직 유럽도 못 다녀왔는데. 이건 취직을 해서 돈이 모이면 여행을 가는, 그런 것으로 해소될 갈증은 아니다.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뭐가 있을까.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 함은 비단 프리랜서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요즘이 어떤 시댄데. 하지만 그렇다고 프리랜서가 아닌 것은 또 뭐가 있는지 제대로 대답하긴 어렵기도 하네. 하루라도 빨리 유튜브를 시작하는게 나에겐 최대의 노력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제대로 취직도 못한 주제에 주제 넘는 소망인가 싶다가도, 10년 20년 30년 앞을 내다볼수록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지점. 이렇게 권태로운 직장을 버텨내는 직장인들의 동력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