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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몽맛탄산수 Jan 06. 2020

구글 맵으로 쓰는 사진 일기
(Dia9 ~ Dia12)

드링크, 온도, 타협, 다시 비행




Dia 9. 드링크

[포르투 6일차]
Miraporto ▶ Cockburn's Port Lodge ▶ Sao Nicolau ▶ 더 하우스 오브 샌드맨 ▶ 미니프레코


 날의 사람

와이너리 거리에서 만난 빈티지 사진사 아저씨. 사진을 찍으려고 3일을 벼르며 아저씨를 관찰했는데, 하루에 손님 한 명 있을까 말까 한데도 늘 같은 시간에 나와 같은 시간에 떠났다. 거창하게는 장인 정신, 소박하게는 생계형 예술가. 

 날의 장소

짧은 경험상 포르투에서 와인이 가장 싼 곳은 Mercado S. Joãou였다. 다른 곳보다 와인이 1~2유로 더 저렴하고, 와인뿐만 아니라 다양한 주류를 판매한다. 아주머니는 많이 까칠하시지만 아저씨는 정말 친절하신 곳. 함께 마실 사람들을 생각하며 신중하게 와인을 고르다 보니 1시간이 후딱 가버렸다. 

 날의 일

포르투에서의 마지막 밤을 애도하며 J언니와 언니의 동행 C동생, K동생과 와인판을 벌였다. 직접 구운 고기와 문어 통조림은 더할 나위 없는 안주였고, 주방 아주머니께 구박받은 우리가 안쓰러웠던 호스텔 직원들이 마련해준 아이스 버킷은 플레이팅에 화룡점정을 찍었다. 머릿속으론 아쉬움, 후련함 그리고 기대감이 섞여 요동치고, 위장 속에선 그린 와인부터 파인 토니, 샌드맨 칵테일, 바이랴오가 섞고 또 섞이던 밤. 

그 날의 무엇

이보다 완벽한 와인 테이스팅이 있을 수 있을까. 칵번 포트에서 1:1로 와인 강의를 듣고 난 후 3가지 와인과 초콜릿이 함께 나오는 테이스팅을 했다. 와인과 초콜릿의 궁합이 정말 이 세상 궁합이 아니었다. 돈만 있다면 매일 했을 거야. (포트 화이트&트로피칼 초콜릿, 10년 산 토니&유자 시나몬 초콜릿, 빈티지 포트&라즈베리 초콜릿)

 


Dia 10. 온도

[포르투 → 리스본]
Dom pipas ▶ Bacalhau Do Porto ▶ Renex Porto ▶ Be Lisbon Hostel 

 날의 사람

아직 어색한 비 호스텔 라운지에 혼자 앉아 수프를 홀짝이는 나에게 어떤 옷이 더 예쁘냐며 말을 건넨 트랜스젠더 언니. 얼결에 언니의 인스타그램 스토리까지 찍어줬다. you're so pretty,라고 말하며 윙크하는 이 언니는 과연 여자 방에 묵었을까 남자방에 묵었을까. 

 날의 장소

Bacalhau Do Porto. 대구 레스토랑인데 그동안 갔던 레스토랑 중에 가장 현대적으로 고급지고 맛있었다. 

 날의 일

마지막 밤의 끝을 함께 잡아준 J언니와 C동생은 하루만 더 묵으라며 나를 잡았다. 그건 어렵지만 아쉬우니까 점심이라도 같이 먹어요, 해서 함께 대구 레스토랑에 갔다.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렸기 때문일까. 어젯밤의 뜨거운 텐션은 간데없이 살짝 어색한 찬기가 돌았다. 이어지지 않는 대화의 공백까지도 썰어먹을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쨌든 박수칠때 떠나는 꼴이 되어 내심 다행이었다. 

그 날의 무엇

국물, 국물이 너무나 고팠다. 한식이 먹고 싶겠나 싶어 한 개만 챙겨 온 컵라면은 전 날 와인 해장용으로 털어버렸다. 마트 곳곳을 뒤져도 국물의 ㄱ조차 찾을 수 없었다. 누들 혹은 국물류 그 어떤 음식도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토마토 수프를 샀다. 포르투갈에서 처음으로 음식 때문에 힘들었다.



Dia 11. 타협

[다시, 리스본 4일차]
쉐라톤 리스보아 호텔 앤드 스파 ▶ 에두아르두 7세 공원 ▶ Amoreiras Shopping Center

 날의 사람

"엄마 장갑 필요한데" 갑자기 카톡이 왔다. 엄마 선물은 이미 샀는데. 청소할 준비를 마친 아이에게 "청소해라" 말하면 오히려 입이 삐죽 나오는 것처럼 '엄마 나한테 장갑 맡겨놨어?'라는 반감이 들었지만 그 카톡 한 줄이 하루 종일 머릿속을 맴돌아 마지막 행선지를 쇼핑몰로 선회했다. 그래도 아직 불효녀 만렙은 아닌가 봐. 

 날의 장소

쉐라톤 리스보아. 55유로에 수영, 스파, 찜질, 마사지 가능. 꼭 가세요. 기왕이면 여행 마지막 날에. 

 날의 일

여행 마지막 날. 근교 호카곶을 갈까, 근처 호텔에서 쉴까 고민했다. 예전의 나라면 당연히 전자였겠지만 지금의 나는야 귀국하자마자 연달아 이틀을 출근해야 하는 비운의 직장인. 호카곶은 다시 리스본을 찾을 구실로 남겨두고 여독 해소를 위해 호텔로 뚤레뚤레 걸어가는데 가죽 부츠가 고장나버렸다. 호카곶 갔으면 정말 큰일 날 뻔. 신은 가끔 내 편일 때도 있다.

그 날의 무엇

일주일 전 리스본보다 날씨가 더 풀려서 과감하게 살색 스타킹을 꺼냈다. 거리를 나서니 다양한 연령의 XY 염색체들의 눈길이 내 다리에 날아와 꽂혔다. 대놓고 쑥덕대기도 했다. 이 날씨에 살스를 신은 게 문제인지, 동양 여자애와 살스 조합이 문제인지, 내 미니스커트 길이가 문제인지 아직도 답을 모르겠지만 그다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나는 내일이면 떠날 사람. 살가운 눈빛으로 "뭘 봐 XX."를 조용히 읊조리며 거리를 활보했다. 



Dia 12. 다시, 비행


 날의 사람

아침에 짐 정리가 꽤 오래걸려 조식도 먹지 못한 채 허겁지겁 우버에 올랐는데, 기사님과 대화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마음 속 긴장이 풀렸다. "여행은 즐거웠니? 리스본에 또 오렴"이란 말, 공항 입국장 앞에서 짐을 내려주며 "잘가"라는 그의 인사가 포르투갈에서 만든 추억의 채도를 한층 높여주었다.   

 날의 장소

파리 샤를 드골 공항. 리스본으로 가는 게이트는 소란하고 산만했는데, 인천으로 가는 게이트는 넓고 쾌적했다. 요거트와 귤로 5시간을 버티며 열심히 여행 일기를 썼다. 

 날의 일

리스본에서 파리로 가는 비행기 안. 간식으로 나눠준 샌드위치를 씹으며 <모순>을 읽다가 눈물이 터져버렸다. 두번째 읽는 건데도 여전히 페이지를 쉬이 넘기지 못하는 책이다. 문장 하나 하나가 주옥같고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 느리게 느리게 읽다보니 마지막 날까지 붙잡고 있었다. 언젠가 나도 이런 무거운 문장 하나는 남기고 죽어야지, 하는 다짐을 했다.  

그 날의 무엇

인천행 대한항공 비행기에서 기내식으로 비빔밥을 먹었다. 아, 그리웠던 한국의 맛이여. 귀국 선물로 더할 나위 없었다. 음식과 보일러때문이라도 나는 한국에서 계속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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