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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몽맛탄산수 Jan 24. 2021

스물여덟 겨울, 리트를 풀었다 (1)

직장인 로스쿨 도전기

나에게 가장 잘 맞는 방식을 찾는 것은 어떤 일에서든 중요하지만 새삼 어렵기도 하다. 여기저기 시행착오에 부딪힐 때 가장 도움이 되는 건 나와 비슷한 사람의 경험인데, 비슷한 사람이 희소해질수록 그 경험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


특히나 주변에서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정보의 환경이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사소한 것부터 시시콜콜 찾아봐야 하는 게 꽤나 스트레스인 동시에 사람을 쭈굴쭈굴 쭈구리로 만든다. 안그래도 나이 때문에 위축 디폴트 값이 높은 직장인인데...


나처럼 늦게나마 새로운 꿈을 찾은 사람이 지레 겁먹고 쫄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로스쿨 입시를 준비한 지난 1년을 돌이켜본다. 나의 기록이 누군가에겐 소중한 시뮬레이션이 될 수 있길 바라는 이타적인 마음 하나, 로스쿨을 준비했던 초심이 잊힐 때마다 꺼내먹을 글을 찌는 사적인 마음 하나를 담아서.



2019. 10 : 본격적인 결심, 영어 성적 준비

- 20대 마지막 도전으로 최대 2년까지만 준비해보자는 결심을 했다. 결정적 계기 같은 건 없었고 잔잔하게 이어지는 고민에 마침표를 찍은 것. "최대 2년"이라는 기간을 스스로 정해두니 여러 과정에서 심리적 부담이 덜했다. 안되면 내년에 또 하지 뭐! (막상 그 내년에는 매우 쫄렸을 것이긴 해도)

- 가장 가까운 친구들에게만 농담 섞어 얘기했더니 친구들은 일단 집리트(집에서 혼자 푸는 리트)나 쳐보고 성적으로 얘기하자고 했다. 약간 오기가 생겼지만 정말 점수가 그지 같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 반 귀찮음반으로 차일피일 미뤘다. 솔직히 이때 풀었어도 12월까진 별생각 없었을 것이다...

- 직장인 특성상 한 번에 여러 개를 동시에 할 수 없기 때문에 리트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정량 요소 학토릿(학점+토익+리트)중 영어 점수를 미리 준비해두었다. 영어 성적의 반영 방식은 학교마다 다른데(Pass or Fail이거나 점수에 급간을 나눠 환산 점수를 부여) 텝스/토익/토플 중에 무엇을 볼 지 정했다면 일단 가장 높은 성적을 받아두자. 지원 학교가 불분명할 경우 더더욱. 나는 P/F 학교만 지원할 생각으로 최저 기준만 맞춰놨었는데, 막상 입시 때 변경한 나군 지원 학교가 영어 점수를 급간으로 반영해서 매우 쫄렸다. 그때 가면 0.1점이 아쉬운게 수험생 마음이더라.

- 7월에 리트가 끝나고 10월 초 자소서 제출 기간까지 영어 시험의 기회가 두세 번 더 있긴 했는데, 나는 게으름+회사 너무 바쁨+지원학교 갈팡질팡 고민으로 시험 접수-취소를 반복하다 결국 생돈만 날렸다.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니 만사 미리 대비가 최고다.  



2019. 12 : 첫 리트

- 집리트 성적이 실제 리트 성적과 거의 유사하다는 선험적 댓글들이 너무 공포스러웠지만 그래도 해를 넘기기 전에 쳐보자는 나와의 약속은 지키고 싶었다. 12월 28일 즈음, 근처 도서관에 가서 2015년도 기출문제를 혼자 풀어봤다. 어떤 문제 유형인지 파악도 안 하고 냅다 풀었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성적이 나왔다. 아직 머리가 싸라 있군 생각하며 시험지 접고 바로 놀러 나갔고 이것은 엄청난 실수였다고 자평한다...



2020. 03 : 스터디 시작(리트, 독서)

- 사람은 자기가 기억하고 싶어 하는 것만 기억하기 때문에 내 머릿속에도 "3월부터 하면 돼~"라는 경험자들의 조언만이 남아있었다. 1~2월엔 공부 생각 자체를 별로 안 했다. 진짜 왜 그랬지... 그나마 도서관에 가서 로스쿨 관련 책이나 법조인들의 책을 읽으며 나름의 워밍업을 했다. 몇몇 문장에 가슴이 뜨거워지다가 혼자 민망해진 순간도 여럿. 직장을 다니다 보니 결국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에 대한 뚜렷한 상이 없을 때가 가장 힘들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일까, 큰 그림을 먼저 그리고 싶었던 것 같다.

- 3월 초였나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진짜 정말 이유를 모르겠음 벼락치기의 본능인가) 학교 커뮤니티에 들어갔는데 이미 1월부터 시작된 스터디 모집글을 보고 살짝 패닉이 왔다. 마음을 다잡고 리트 기출을 푸는 스터디에 들어갔다.


- 스터디 꼭 해야 할까? 나는 1) 직장인 특성상 퇴근 이후에 쉽게 풀어지는 것을 다잡기 2) 소소한 정보 공유 3) 외로운 고독사 방지를 위해 참여했다. 공부를 안 하다 하려니까 루틴과 습관 잡는 것조차 쉽지 않았는데 이런 부분을 보충하기엔 스터디가 제격이었다. 역시 남 눈치 보며 공부하는 게 효율 최고. 아직 학생인 스터디원들이 정보에 빨라 간접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 로스쿨 준비를 여기저기 알릴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 지치거나 힘들 때 불현듯 찾아오는 어두운 동굴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스터디원들과 정서적인 교류를 많이 나눈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함께하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었다.

- 리트 스터디에서는 보통 기출이나 사설 문제집(ex. 잘 고른 300제)을 미리 풀어온 뒤 모르는 부분에 대해 함께 토론하고 정답의 근거나 풀이 방식을 공유했다. 첫 스터디는 이유불문으로 한두 명씩 그만두면서 금방 파투가 났고, 부랴부랴 구한 두 번째 스터디는 4명이서 끝까지 갔다. 10년 치 기출(1주일에 2개년씩) > 잘 고른 300제 > 사설 모의고사 순서대로 풀었다. 때때로 피셋 한두 문제를 시간 재고 풀거나, 모의 리트 느낌으로 사설 모의고사를 풀타임으로 풀기도 했다. 평일 저녁, 주말 오전이라 참여가 부담스럽진 않았다.

- 정답 근거를 같이 얘기하다보면 가끔 스터디원들끼리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도 있다... A는 A라서 A이다 라고 해설이 적혀있는 경우에 특히. 괜히 내말이 맞네 니말이 맞네 힘빼지 말고 집에 가서 다시 한번 찬찬히 생각해보는게 시간 절약 에너지 절약에 좋은 것 같다. 집에 가서 생각해보면 내가 틀린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기도... 뛰어난 스터디원들과 함께해 다행이었다. 

- 독해력 상승 및 언어이해 지문 친화력을 높이기 위해서 독서 스터디도 잠깐 했었는데, 과학, 철학, 미학 등과 관련된 어려운 책들을 일주일에 1권씩 읽고 파트를 나눠 요약하는 스터디였다. 누가 사줘도 안 읽을 책들을 꾸역꾸역 씹어먹다가 체할 것 같아서 중도하차했다. 꼭 어려운 책이 아니더라도 긴 글을 읽고 요약하는 습관만 들이면 충분할 것 같다는 개인적 생각.(물론 그 뒤엔 시간이 없어 리트 푸는 데에만 정신을 쏟았지만)


- 리트는 언어이해 30문 / 70분, 추리논증 40문 125분으로 구성돼있다. 기출 1개년 푸는 데에도 거진 세 시간 반이 걸린다. 지문 하나, 문제 하나 떼어서 개별로 시간을 재서 푸는 것도 방법이지만 순간의 집중력이 70분, 125분간 이어진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풀타임으로 풀어보는 연습도 중요하다. 진짜 추리 20번쯤 오면 정신이 혼미해지고 시계 초침이 눈앞에서 느려지는 나 자신을 목격하게 된다...

- 주말에 풀타임으로 공부해도 1개년 풀고 오답 정리하면 하루가 금방 간다. 평일에 퇴근하고 언어이해 풀면 12시가 다돼서 추리논증은 반으로 쪼개서 풀 때도 많았고, 야밤에 카누 타 먹는 몹쓸 짓도 많이 했다. 채점하면서 졸려서 그래 졸려서 라고 합리화 한건 비밀... 쨌든 평일엔 쪼개서, 주말엔 풀타임으로.

- 온라인에선 3월이면 기출 2 회독, 3 회독 운운하는데 정작 나는 1 회독을 이제 시작했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났다. 지금부터 빡세게 해도 리트(7/19)까지 기출 2 회독을 겨우 할까 말까 한 시간이었다. 3월부터 해도 된다고 한 놈 누구야... 1월부터 할걸... 1월부터 할걸... 아이고... 아이고... 울어봤자 시간만 낭비였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진짜 늦은 거 맞음.

- 한 문제당 언어는 2분, 추리는 3분 정도로 잡고 푸는데 솔직히 제대로 지킨 문제는 거의 없다. 나는 한번 풀기 시작한 문제를 끊고 넘어가는걸 잘 못해서(끝까지 팬다) 대충 끝까지 다 풀기보다는 맞출 수 있는 만큼까지만 푸는 전략을 택했다. 공부를 너무 오랜만에 하면 자기가 어떤 스타일인지 잊어버렸을 수 있는데, 이걸 빠르게 상기해서 문제 푸는 요령을 빠르게 정하는 것도 시간이 부족한 직장인에겐 효율적인 공부 방법인 것 같다. 이러나저러나 결국 빠르게 많이 맞춰야 이기는 게임이니... (이상 패배자의 변)

- 3월부터 7월까지 10개년 기출 1번, 잘 고른 300제 언어/추리 한 권씩, 사설 모의고사 4~5개 정도를 풀었다. 10개년 기출 중 최근 3개년 정도만 6~7월에 두세 번 정도 반복해서 풀어보았다. 두세 번 풀면 다 외우지 않냐고? 늘 새롭고 짜릿하니 걱정 노노. 실수한 데서 계속 실수하는 자신을 보며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다. 

- 기출을 아끼라는 말도 있는데 나는 반대다. 매년 출제 경향이 오락가락 한다는 말도 있지만, 어쨌든 검증된 문제인 기출은 이르면 이를수록, 반복하면 반복할수록 좋은 것 같다. 문제의 콘텐츠는 계속 바뀌겠지만 문제로 검증하려는 사고 방식, 즉 출제자의 의도는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같은 문제를 여러번 풀면서 본인이 자주 실수하는 사고의 로직을 찾아내는게 중요하지 않을까. (이상 프로실수러의 변)

- 기출을 풀면서 12월 말처럼 괜찮은 점수대가 나온 적은 놀랍게도 단. 한. 번. 도 없었다. 연고 없는 타향살이를 해야 하나 걱정스러운 점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려치우지 않고 완주한 게 결국 좋은 결과를 가져온 것 같다. "왜 이렇게 많이 틀렸을까 난 역시 쓰레기야"보다는 "왜 또 뭐 뭐가 문제라서 틀린 건데 함 봐보자"라는 깡패 같은 마인드로 문제를 조져버리겠다는 자세가 핵심. 공부도 기세다.

- 리트 외에 자소서 면접 이런 건 하나도 생각 안 하고 리트만 팠다. 로스쿨 준비는 한 번에 하나씩만 하면 된다는 친구의 말이 진짜였다.

- 독서실이나 스터디 장소로 이동할 때 짬짬이 변호사들의 팟캐스트를 들으며 변호사 빙의도 했다. 딱히 큰 도움이 되진 않았지만 자투리 시간까지 준비에 매진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 현타와 뿌듯함을 동시에 느꼈다.


- 일과 공부를 병행하다 보니 사실 고민만으로 시간을 날린 적도 많다. 이렇게 한다고 정말 될까? 차라리 일에 더 몰입해서 연봉을 올리든 이직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가도, 막상 일에 치이다 보면 그래 이 길은 내 길이 아니야의 반복. 샤프를 쥐었다 놨다 고민하다가도 막상 문제를 풀고 채점하는 게 소소한 성취로 느껴져 재미있을 때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안 그래도 부족한 시간을 고민하면서 날린 게 아깝긴 하다. 뭐라도 해보고 그걸 바탕으로 고민해야지, 책상 앞에 앉아서 멍 때리는 건 마이너스 이율과도 같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주말에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있었다.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휘적휘적 헤엄치다가 아 내가 바로 우주 쓰레기구나 라는 깨달음을 얻은 후에야 충혈된 눈으로 잠에 드는데 그렇게 푹 쉬고 나면 신기하게도 월요일 아침이 꽤나 상쾌했다. 역시 방전에 전원 off가 답. 컨디션 관리도 공부라면 공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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