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로스쿨 도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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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시 날짜가 다가올수록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잠에 들기 전 불현듯 긴장감이 밀려오다가도 다음날 출근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까먹기를 반복. 이거 진짜 치는 거 맞나? 턱없이 비싼 응시료가 그나마 현실감을 일깨워주었다.
- 유경험자 친구들은 "컨디션"을 강조했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를 해도 그날 컨디션이 꽝이면 망치는 거라.
- 암기 위주의 시험이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갖고 있는 기본기를 바탕으로 법학 적성을 평가하는 시험이라는 것이 마음을 편하게 하면서 동시에 불편하게 만들었다. 직장인이기에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는 공부 인풋을 합리화하기엔 좋았지만 과연 실전에서 잘 해낼 수 있을까에 대한 불안감 역시 끝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컨디션 관리를 잘하라는 친구들의 말은 결국 멘탈을 단디 하라는 뜻이었던 것 같다. 이런저런 잡생각은 내려두고 눈 앞에 문제에 흔들리지 않고 집중하는 것, 그게 바로 최상의 컨디션이 아니었을까.
-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변수는 어쩔 수 없지만, 나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는 부분은 제대로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동안은 시간대에 개의치 않고 시간이 나는 대로 문제를 풀었는데, 시험 치기 2주 전부터는 되도록 오전에 언어이해 지문을 풀고, 추리는 오후나 저녁에 풀었다. 추리는 어차피 잠이 다 깬 후에 보니까 큰 상관이 없고, 다만 언어이해는 혹시나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지문을 읽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아침 시간대에 긴 글을 읽는 습관을 들이려고 노력했다. 언어 관련 기본서 두 권 정도를 급하게 구매해 오전에 조금씩 조금씩 풀어나갔다.
- 이쯤 되니 점수를 올리려는 욕심은 내려놓은 지 오래였고, 적어도 아는 문제를 실수로 틀리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문제를 풀 때도 틀린 것엔 개의치 않았지만 실수한 부분은 조금 더 주의하고, 실수한 패턴을 외웠다. 단서 조항을 빼먹는다든지, 포함 관계를 반대로 생각한다든지 그런 것들. 초시에 가장 잘 본다는 유경험자들의 조언도 행운의 부적처럼 되새겼다.
- 논술 준비는 거의 안(=못)했는데, 이것도 영어점수와 마찬가지로, 반영하지 않는 학교들에 지원할 거라면 중요하진 않지만, 리트 성적을 보고 지원 학교가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일단은 아무 말 대잔치라도 최대한 예쁘게 포장해서 쓰는 게 좋을 듯하다. 나는 1주일쯤 전에 OOO 논술 교실 같은 네이버 블로그에 올라온 글들을 몇 개 읽어보고 모범 답안도 몇 번 읽어보고 갔다. 남들은 어떻게 쓰는지는 알고 가야 마음이 편한 쫄보...
- 리트 응시하는 주에는 업무 스케줄을 미리미리 조정해두는 게 중요하다. 전날까지 야근해서야 제 실력이 발휘될 리 없고, 업무 생각을 비워내는 시간도 필요하다. 시험 치는 중에 불현듯 못다 한 업무가 떠오르면 안 되니까. 시험 시간이 길다 보니 중간중간 집중력이 흐려지곤 하는데 찜찜한 마음으로 퇴근한 날이면 문제를 풀다가도 불현듯 일 생각이 나곤 했다. 나는 고맙게도 그 당시 회사가 크게 바쁘지 않아 리트 전날 연차를 낼 수 있었는데, 아무리 못해도 오후 반차는 꼭 사수하는 게 좋을 것 같다.
- 리트 전날엔 기상부터 취침까지 리트 응시 날과 동일하게 시뮬레이션을 해봤다. 은근히 긴장을 했는지 전전날 밤에 잠이 오질 않아서 결국 서너 시에 잠들어 붕어눈으로 깨어났다. 아 이런 게 컨디션 조지는 거구나? 전날 밤은 꼭 잘 자야 하니 하루 종일 쪽잠도 마다하고 붕어눈으로 지냈다. 실제 시험 시간에 맞춰 문제도 풀어보고, 쉬는 시간에 초코바도 먹어보고, 일부러 점심으로 맛있는 것도 먹고, 아이스크림도 먹어주고, 멍도 때리고... 전/현 로생 친구들의 응원 문자로 주먹도 불끈하다 보니 하루가 훅 갔다. 시뮬레이션을 빙자해 스스로에게 용기를 불어넣은 하루.
- 유경험자들에게 조언을 부탁했더니 어차피 다 못 풀 거 잘 찍으라며 행운의 번호를 추천해줬다. 새겨듣자.
- 웃프지만 배 관리가 정말 중요하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 지면 눈앞에 글자가 정말 흐려진다. 되도록 원래 먹던 것만 먹고, 원래 하던 것만 하도록 하자. 리트 치기 일주일 전에 언니가 사다둔 푸룬 주스를 먹고 독서실에 갔는데 정말 배가 미친 듯이 아파서 화장실 문을 부여잡고 울기 직전까지 갔던 쓰라린 경험... 만약 리트 당일에 별생각 없이 푸룬주스를 먹고 갔다면 아마 응시 포기자가 되었을 것이다...
- 리트는 한양대에서 응시하였다. 한양대 지망자가 많지 않았는지 1 지망이 바로 되었는데, 스터디원들을 보니 신청자가 많은 서울 중심부로 신청한 경우 튕겨서 저 멀리 송파나 중앙대 쪽으로 가는 경우도 있었다.
- 비가 많이 와서 택시를 타고 갔다. 안 왔어도 타고 갔겠지만... 부모님 차를 타고 온 사람들이 좀 부러웠다.
- 챙겨간 것들: 무릎담요, 물, 카누, 초코바, 필기구, 신분증, 컴싸, 아날로그시계, 점심용 샌드위치. 꽤나 추웠다... 운동복에 상투 튼 머리가 마치 원시인 같았지만 어차피 아는 사람도 없는 내게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 컴싸나 시계는 학교 앞에서도 팔지만 미리 준비해 가는 게 마음이 편할 듯하다.
- 화장실에 줄이 꽤나 길었다. 미리미리 다녀와야 마음이 편할 듯하다.
- 코로나로 인해 좌석 간 거리두기로 멀찍이 띄어 앉았다. 나는 맨 뒷줄이었는데, 교실 전체를 관장(?)할 수 있는 뷰여서 마음이 더 편했다. 맨 앞줄이면 괜히 더 긴장돼...
- 대망의 언어이해 시작. 무슨 정신으로 풀었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막히면 막히는 대로 풀리면 풀리는 대로 와다다다 풀어나갔다. 기출 풀 때보다 더 못 풀었지만 딱히 멘붕 하진 않았고(해탈) 행운의 숫자로 예쁘게 찍어준 뒤 제출했다. 솔직히 시험 끝나고 난 뒤 생각:?... 초코바 어딨지
- 추리논증 영역이 시작되기 전에 20여분 정도 쉬는 시간이 있다. 챙겨 온 초코바를 씹으며 멍을 때렸다. 125분 지옥으로 뛰어들기 전 당 충전은 필수이니 오답노트는 깜빡하더라도 초코바나 초콜릿은 절대 깜빡하지 말자...
- 추리논증은 생각보다 문제가 잘 풀려서 속도를 내다가 15번 이후로부터 다시 원래의 나로 돌아와 시간에 쫓겨다녔다. 역시나 시간은 부족했고 행운의 숫자로 마킹을 완성했다.
- 추리까지 다 보고 나서 점심을 먹는다. 주변에 편의점이 있긴 했지만 나갔다 오기 귀찮기도 해서 미리 사온 샌드위치로 간단하게 해결했다. 다들 비슷한 것 같았는데, 비가 와서 추워서인지 국물이 당기긴 했다. 보온병에 따땃한 마실 것을 준비해왔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 논술은 사실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답안지가 원고지 형태라 띄어쓰기와 교정부호가 은근히 신경 쓰였고 제대로 잘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많이 써보지 않아서인지 시간 분배에 실패해서 2문의 글자 수를 아슬아슬하게 못 채웠는데 글자 수가 감점 요인이기 때문에 웬만하면 한두 번 써보면서 길이감은 익히고 응시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실패자의 변)
- 끝나자마자 다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복귀했다. 문제지는 다 챙겨 올 수 있다. 5시 좀 넘어서 공식 정답이 올라왔다. 답답한걸 못 참는 나는 바로 채점을 해버렸고 바로 술을 마시러 나갔다...
- 친구들에게 틀린 개수를 말해줬더니 내년에 한번 더 치라고들 했다. 아 내점수 진짜 쓰레기인가... 좌절...
- 사실 표준점수로 성적표가 나오기 때문에 당장의 정답 개수만으로는 정확한 점수 급간이나 백분위를 가늠하기 어렵다. 매년 난이도도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작년/재작년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 친구들과 놀면서도 학교 게시판과 서로연을 몇 번 들락거리다가 아 이게 무슨 의미인가 싶어서 그만두고 눈앞의 술에 집중했다.
- 리트 성적은 응시하고 한 달 정도 후에 나온다. 성적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냥 마냥 쉬었다. 어차피 서류는 10월 초라서 마음에 여유가 차고 넘쳤다. 물론 이러한 여유는 추후 눈물의 5일 밤샘으로 이어졌지만...
- 때마침 회사가 굉장히 바빴다. 서비스 출시를 앞두고 야근도 많았어서 출근-퇴근을 반복하며 별생각 없이 지냈다. 모든 고민은 리트 성적 발표 이후로 미뤄두었다.
- 로스쿨 준비의 장점(?)이라면 이렇게 강약 조절이 가능하다는 것. 1년 내내 전력으로 달려야 하는 게 아니라, 각 단계별 시기에 맞춰서 걷고 뛰기를 반복하면 된다. 7월 리트, 10월 자소서, 11월 면접. 생각보다 일정이 빡빡하진 않다. 나처럼 미루지만 않는다면... 아마 이건 개인 성향과도 관련이 있는데, 나는 원래 조금씩 조금씩 해나가기보다는 마감기한에 스퍼트를 내는 타입이라 더욱 그랬다. 그래도 중간중간 이렇게 길게 쉴 수 있어서 다시 전력 질주할 힘을 낼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직장생활과 절대 병행 불가하지 않다는 것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 8월 중순 즈음에 성적이 나왔다. 사이트에서 조회해서 성적표 출력도 가능하다.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는 성적이었지만 5개월간의 노력이 성적표 한 장에 응축되어있다니 뭔가 감개무량... 메가로스쿨에 리트 점수와 대강의 정성/정량 데이터를 입력해 모의지원도 해볼 수 있다. 내가 모의지원 지원자 중 몇 등인지, 정원 안에 드는지, 정원 밖이라면 2 배수인지 3 배수인지 등등... 사람들이 모의지원을 하면 할수록 데이터는 더 정확해지고 메가로스쿨이 독점 사이트이기 때문에 모의지원 데이터가 실제 지원율과 거의 유사했다. 여러 개 학교에 넣어보고, 좌절하고, 기뻐하고, 좌절하고... 를 반복하다가 한편으로는 정성 요소 반영이 거의 안 된 데이터니 여기에 너무 연연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어 그 뒤로는 사이트에 잘 들어가 보지 않았다. 부족한 리트, 정성 요소로 뒤집을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한 근자감으로 8월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