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is a VICTORY, <히든 피겨스>

Here at NASA, we all pee the same color

by 자몽맛탄산수

(스포 주의해주세요)


이번 주말의 영화는 히든 피겨스.

매번 보고 싶은 영화들을 미루고 미루다 상영기간을 놓친 적이 한두번이 아니라, 오늘은 조조할인을 포기하고서까지 히든 피겨스를 보러 가까운 왕십리CGV를 찾았다. 왕십리 살면서 이번이 두번째 방문인건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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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피겨스는 1960년대 미국 NASA의 머큐리계획(유인 우주 비행 탐사 계획)을 성공으로 이끈 숨은 주역 3인방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왼쪽부터 NASA에 근무하는 흑인 여성들을 이끄는 대모이자 프로그래머로 거듭나는 본, 천재적인 수학 실력으로 쟁쟁한 나사 연구원들을 제치는 동시에 IBM은 없는 신뢰까지 갖춘 캐서린, 흑인 여성 최초의 NASA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 법정에 서면서까지 당당히 자신의 권리를 쟁취하는 메리다.


원래 그런거야, 그런대로 하면 되.

원래 인생이 그런거야- 라는 말을 스스로도 자주 하는 편이지만 사실 세상에 원래 그런 것이 어디있겠나. NASA에는 흑인 여성이기에 그들이 당연히 감내하고 견뎌야 하는 '원래 그런 것'들이 참 가득하다.


천재적인 수학 능력을 가진 캐서린에게 새로운 부서의 상사는 중요한 정보가 검은펜으로 죽죽 그어진 서류를 던지며 '대충 검토하는 척이나 해'라는 말을 던지고, 커피 머신 한번 썼다고 그새 유색인종 전용 주전자를 만들어버린다. 물론 주전자는 비어있다. 유색인종 여자 화장실은 오로지 한 곳만 있기에 캐서린은 업무 시간에 눈치를 봐가며 서류 뭉텅이를 들고 800m 왕복 전력질주를 하기도 한다.


NASA에 다니는 흑인 여성들의 큰언니인 본은 몇 개월 전 자신들을 맡았던 주임이 없어지면서 주임 노릇을 맡아왔다. 그러나 돌아오는건 흑인 여성이기에 정식 주임이 될 수 없다는 차가운 거절뿐이다. 본은 IBM의 슈퍼 컴퓨터가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시대가 변하고 있음을 감지한다. 인간의 계산능력과 비교할 수 없는 슈퍼 컴퓨터의 위력을 확인한 본은 자신과 동료들의 일자리가 위험해질 수도 있음을 감지하고 프로그래밍에 도전하는데, 원하는 책을 찾기 위해 백인들의 도서관에 들어가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메리 역시 부서를 옮기면서 자신의 능력을 알아봐주는 좋은 멘토를 만난다. 자신의 능력은 알고 있지만 흑인여성이기에 일찌감치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엔지니어의 꿈을, 팀장은 다시 일깨워준다. 메리를 움직인 그의 한마디, '우린 지금 기적을 살고있어.' 큰맘 먹고 엔지니어에 지원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거절. 얄밉게도 그새 자격 요건이 바뀌었고, 백인들만 다닐 수 있는 학교의 수업을 들어야만 엔지니어 지원이 가능하다는 통보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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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A에서 모든 사람의 오줌 색깔은 똑같아

히든 피겨스의 매력은 바로 '원래 그런 것'에 도전하고 깨부수는 통쾌함이다. 단순히 운이나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실력'으로 승부보는 이 삼인방의 모습은 어떻게 보면 참 비현실적인 그들의 성공에 나름의 당위성을 부여한다.


낭중지추라고 했던가, 캐서린의 미친듯한 수학 실력은 팀장의 굳건한 신뢰를 받게 된다. 그런데 한 사건이 터지고 마는데, 그게 참 명장면이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에도 어김없이 화장실을 위해 800m를 전력질주하고 돌아온 캐서린에게 예민해진 팀장은 의심의 눈초리를 던지고, 결국 캐서린은 폭발한다. 니들이 800m 뛰어봤어?엉? 팀장은 그 길로 유색인종 화장실의 간판을 도끼로 부숴버린다. 'Here at NASA, we all pee the same color.' 정말 통쾌했던 장면.


한편 비싼 돈 주고 IBM의 슈퍼 컴퓨터를 데려왔건만, 정작 본사 직원들도 동작 방법을 몰라 IBM 시동 조차 걸지 못한다. 이때 등장한 본. 그새 프로그래밍에 입문해 슈퍼 컴퓨터에 심폐소생을 하고, 결국 자신의 동료들 30여명까지 프로그래밍에 입문시켜 일자리도 지키고, 후엔 백인 여성들까지 가르칠 수 있는 당당한 주임으로 자리잡는다.


이 둘도 물론 통쾌했지만, 최고 명장면을 꼽으라면 메리의 법정씬을 꼽겠다. 통쾌해도 이렇게 설득력있게 통쾌할 수가 없그든요. 이미 판사 신상까지 쫙 조사한 철저한 메리, 판사 앞에 다가가 당당하게 얘기한다.


판사님, 당신은 최초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시죠? 당신이 오늘 맡은 재판 중에, 100년 후에 기억할만한 재판이 뭐가 될 것 같나요? 판사님이 결정하면, 저는 최초의 흑인 여성 엔지니어가 될 수 있을거에요.


기억력의 한계로 완벽하게 옮겨 적을 수는 없지만, 이 당당한 호소를 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메리에게 수업을 허가해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면접같은데 가면 이렇게 말해야 뽑히려나 (한숨)


통쾌한, 그러나 살짝 2% 아쉬운

NASA를 쥐락펴락하는 삼인방의 도전과 성공이야기가 통쾌하고 흥겹기도 하지만, <문라이트>를 먼저 봤던 탓인지 편견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NASA라는, 그나마 실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공간이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나 싶어 마냥 통쾌하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그 실력마저 결국엔 기술로 쉽게 대체되고, 결국 필요에 의해 다시 불려나온다. 그들에게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발전이고 성공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 기회가 만들어진 맥락을 골똘히 생각할수록 왠지 모를 씁쓸함이 남는다.


또 여자의 적은 여자라 했던가, 이들의 도전을 응원하고 격려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백인 남성이고 백인 여성들은 오히려 이들을 견제하기 바쁘게 그려진다. 오히려 여성의 입장은 여성이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텐데. 물론 당시 백인 여성에게도 유리 천장이 있었겠지만, 해결의 직접적인 key가 죄다 남자들에게 쥐어져있는 것도 아쉬웠던 부분.


곱씹어보면 이런저런 아쉬움이 남기도 하지만, 일단 만들어져서 참 다행이고 의미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문라이트나 히든 피겨스처럼, 누군가가 나서서 다루지 않으면 평생 모르고 살아갈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가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아, 생각해보니 문라이트에서 나온 두 명의 배우를 히든 피겨스에서도 찾을 수 있다. 반가운 얼굴이었어 :)


배경음악이 흥겨워서 유튜브에 검색했다가 찾은, 20세기 폭스에서 만든 영상으로 감상을 마무리해야겠다.

They'll call it a mistery, but we're gonna call it victory !


https://youtu.be/gXjVl-CySRM?list=PLc2y_FcX7qLIJvOcG30CoJyXQL3ayBk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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