짤막한 여름 휴가를 다녀왔다
― 대학교 때 알게됐지만 '동기'보다는 '친구'에 가까운 사이가 있다. 길고 긴 대학생활을 얽히고설켜 함께 하면서 서로의 역사를 본인보다 더 잘 아는 사이. 매일같이 연락하지 않아도, 오랜만의 카톡을 가벼운 마음으로 보낼 수 있는 그런 사이다.
"우리 이제 슬슬 만날 때 되지 않았나?"
― 계절이 바뀌거나 누군가의 생일이 찾아올 때마다 정기적으로 만나는 우리. 이렇게 가늘고 긴 인연을 이어오는 것도 참 재미있다. 이번엔 여름 휴가를 함께 가기로 결정. 목적지는 강릉. 계획을 빡빡하게 세워볼까도 싶었지만, 우린 모두 귀찮았다. 늙음+귀찮음이 합쳐지면 꽤 무대뽀로 여행을 가게되는데, 당장 숙소만 잡아놓고 여행 전날까지 그 누구도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이런 것도 죽이 잘 맞아야 가능한 일이다. 이래서 우리가 오래 만나는 건가.
― 친구 하나가 운전을 시작했다. 최근에 연수를 받아 장롱 면허를 탈출한 그녀는 요즘 아버지 차를 몰고 다닌다. 이번 여행에 드라이버 역할을 자처했으나 여행 3일 전 주차장에서 왼쪽 문을 갈아버린 그녀. 우리는 강릉에서 폐차만은 피할 수 있기를 다함께 기도해주었다.
― 왕십리-양재-사당-서울대입구에 흩어져 사는 우리들의 꼭지점으로 교대역이 당첨됐다. 9시에 만나기로 했으니, 9시 반이 되어서야 모두가 모인 것은 당연지사. 관악타임은 영원하다. 네비는 우리에게 3시간 15분이면 된다고 경로를 추천해주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예상 도착 시간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결국 2시가 넘어서야 강릉에 도착할 수 있었다.
― 버스를 탔다면 당연히 꿀잠만 잤겠지만, 우리만의 공간이 있으니 5시간이 지루할 틈 없이 지나갔다. 노래 떼창도 하고, 근황 업데이트도 하고, 점심 뭐먹을까 검색도 하고, 톨게이트에서 하이패스 차선 대신 발권 차로에서 무단 질주해서 당황했지만 알아서 떼인 돈 잘 챙겨가겠지 안심도 하고, 휴게소에서 소떡소떡도 먹고(이게 이렇게 맛있는줄 정말 몰랐다), 맑디 맑은 하늘에 구름을 보며 감탄도 하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웃을 수 있다는게 이렇게 행복한 일이었나? 편안하면서도 살짝 들뜬 차 안의 분위기가 새삼 반가웠다.
― 강릉에서의 첫 끼니는 순두부. 경포호 근처에 위치한 순두부 마을로 향했다. 이미 많은 가게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기에 웨이팅이 가장 적은 곳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5시간동안 소떡소떡으로 버틴 나 칭찬해.
― 순두부의 보드라운 촉감은 아침도 제대로 못 먹고 달려온 우리의 위를 편하게 달래주었다. 뽀얀 순두부는 밍밍하면서도 식감이 좋았고, 얼큰한 순두부는 서울의 여느 조미료 범벅 찌개와는 달리 건강한 매운 맛이었다. 두 개를 번갈아 먹으면 마치 단짠단짠과 같은 대비 효과를 느낄 수 있어 숟가락을 쉬이 멈출 수 없다. 거하게 식사를 마친 한 친구는 말했다. "요즘 맛있는걸 먹으면 그 순간이 기억이 안나. 어느샌가 내 앞에 음식이 사라져있어." 하지만 그 친구를 뺀 나머지는 모두 알고 있다. 친구 너 원래부터 그랬단다.
― 점심을 먹으니 체크인 시간이 얼추 다 되어 숙소로 향했다. 우리의 숙소는 하평해변 앞 풀빌라케이. 빌라k라고 검색해도 나온다. 예전에 히노끼 욕조에서 다함께 족욕했던 추억이 너무 좋았어서 이번엔 숙소 안에 풀장이 있는 풀빌라로 예약을 했다. 사진에선 잘 드러나진 않지만 안쪽에 꽤 깊고 넓은 풀장이 있고(심지어 월풀 기능과 조명까지 달려있는 고오급진 미니 수영장이다), 하프오션뷰의 이름을 달고 있지만 최소 3/4오션뷰 정도는 된다. 기대는 낮출수록 행복한 법이라는 사실을 사장님이 간파한게 틀림없다.
―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잠시 누워있다가 까딱 잠들 뻔했다. 겨우 몸을 일으켜 해변에 나가니 벌써 다섯시. 해는 아직 중천에 걸려있었지만, 해수욕장의 시계는 아랑곳 하지않고 칼같이 9시 개장 6시 폐장을 지킨다고 한다. 아쉽지만 남은 1시간이라도 알차게 놀아야지 뭐. 튜브에 몸을 맡기고 두둥실 두둥실 바다를 떠다니니 이런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자꾸만 파도에 떠밀려가는 우리에게 구조대원 아저씨는 선을 넘어가지 말라며 주의를 줬다. 우리도 가고싶어서 간게 아니라구요. 바닥의 돌무덤을 딛고 선 안팎을 오가기를 수차례 반복하다보니 1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저질 체력들에게 1시간은 충분했다.
― 물놀이의 완성은 샤워를 마친 후 먹는 맛난 식사. 뽀송하게 말린 몸을 이끌고 잠시 저녁 노을을 감상하다 사천진 물회마을로 향했다. 유명하다는 장안 횟집에 가려고 했지만 웬일인지 아무런 안내도 없이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혹시 사장님 부부가 대판 다투신게 아닐까, 우리 마음대로 상상하며 바로 옆에 있는 주문진 횟집에 갔다.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야, 라는 합리화와 함께.
― 물회, 오징어회 비빔밥, 우럭미역국으로 한 상을 차렸다. 다 합해서 6만원이 조금 넘는 가격인데, 그에 비해 양은 많지 않았다. 관광지가 다 그렇지 뭐, 합리화라는 마법의 주문을 외우면 마음이 편해지고 음식도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다. 특히 물회에 들어있는 해삼의 식감이 유난히 오도독 오도독했다. 뭐야 맛있어!!! 해삼에 감탄하는 동안 우럭 미역국의 우럭은 친구들의 입속으로 다 사라져버렸다. 결국 나는 그냥 '미역국'을 먹었다. 다음에 또 올 기회가 생긴다며 장안 횟집에서 우럭미역국을 반드시 먹을테다.
― 우리의 식사가 이렇게 쉽게 끝날리가 없다. 이제 그렇게 유명하다는 꼬막의 차례. 사실 물회를 먹기 전에 꼬막을 먼저 먹을까도 고민했지만, 이 집(엄지네 포장마차)의 웨이팅을 어마무시하다는 후기를 읽고 바로 포기. 뚠뚠한 배를 두드리며 꼬막집 앞에 도착하니 아니나다를까 많은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뭐야, 여기 뭐 얼마나 맛있길래 이래? 심지어 테이크아웃 번호표를 뽑았는데도 사장님은 쿨하게 "2시간 뒤에 오세여^^" 라고 말했다. 잘되는 집은 쿨함이란... 한편으론 인스타 등의 SNS로 붐업되는 맛집 열풍이 점점 극단적으로 변해가는 것 같아 씁쓸함을 느꼈다.(는 인스타 검색해서 찾아간 1인)
― 꼬막과 함께 먹을 와인, 안주를 사고도 시간이 남았다. 차가 있는데 어디든 못가랴. 밤바다를 보기위해 강문 해변으로 향했다. 사람도 차도 너무 많아서 주차하는데 고통받았지만 친구는 잘 해냈다. 장하다 요녀석. 마트에서 산 안주에서 맥주 두 캔과 과자 한 봉다리를 챙겼다. 짭쪼름한 바닷 바람까지 조미료로 얹어 시원하게 노상을 깠다. 역시 바다는 밤바다지.
― 꼬막을 공수해 숙소로 돌아왔다. 치즈, 체리, 만두, 꾸이꾸이, 와인, 풋젤리의 조합으로 다시 한 상을 거하게 차렸다. 각자의 취향을 200% 반영하면서도 조화로운 조합이었다. 꼬막은 사알짝 식은 감이 있지만 쉽게 먹기 어려운 메뉴라서인지 시간과 돈이 아까운 맛은 아니었다. 사진을 보니 살짝 탄 만두의 뒷모습이 아련하네.
― 물놀이는 바다에서 충분했기 때문에, 실내 풀장은 더운 물을 받아 온천으로 변신시켰다. 훌렁훌렁 옷을 벗어던지고 "어... 시원하다..."라고 말하는 우리들. 나이를 먹긴 했구나. 예전엔 재밌는 것, 신나는 것, 새로운 것을 함께 할 사람들을 찾아다녔는데 요즘에는 일상적인 것, 평범한 것을 함께 할 사람들이 더 소중하고 그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편안함을 주는 그런 사람들. 모처럼 편안한 밤이었다.
― 이번 여행은 날씨 덕을 톡톡히 봤다. 아침 햇살에 눈을 뜨니 오늘도 여전히 맑음. 컵라면으로 깔끔하게 아침을 해결하고 퇴실 준비를 마쳤다. 자- 다시 바다로 가볼까? 물놀이하느라 못 찍은 사진을 실컷 찍으며 바다를 만끽했다. 서벅서벅 모래 속으로 빠지는 발을 힘껏 이끌어 파도의 코앞까지 달려도 보고, 투명한 물 속에 손을 담가 담가 손가락 끝부터 차가운 기운을 느껴본다. 몸과 마음에 묵은 때가 사악- 씻겨나가는 기분. 이 맛에, 여름이면 자꾸 바다가 보고싶어지나보다.
― 막힐 길을 생각하면 일찍 떠나야했지만, 아쉬운 마음에 좀처럼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언제 가도 오래걸리는거면 하고싶은건 다 하고 가자! 친구들을 졸라 보트를 탔다. 보트 얼마에요?라고 묻자 쿨하게 5-7-10(만원)을 부르는 아저씨. 강릉의 민심을 테스트해 볼 기회였다. 튜브로는 갈 수 없었던 깊은 바다까지 단숨에 질주하는 보트를 타고 십여분간 스피드를 만끽했다. 셀카를 찍으려는 우리를 위해 잠시 속도를 늦춰주고, 끝날 듯 안 끝날듯 밀당하는 아저씨의 노련한 운전솜씨를 보니 강릉의 민심은 아직 살아있는 것으로.
―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긴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배를 채워야 했다. 근처에 있는 테라로사와 사천진 해변 근처에 양식당을 찾았다. 테라로사는 사람이 엄-청 많았다. 해가 너무 뜨거워 주변을 제대로 구경하지 못한건 아쉽지만, 테라로사 특유의 높은 천장과 탁 트인 구조가 참 좋았다. 진리해변길27이라는 양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식전빵부터 디저트까지 세심하게 신경써주는 집이다. 주 메뉴는 해산물을 활용한 파스타나 리조또인데, 특히 깻잎리조또는 정말 JMT. 꼭 먹어야한다. 후식으로 내려주시는 홍차를 위해 어느정도 위는 남겨놓을 것.
― 다시 5시간을 걸려 서울에 올라왔다. 중간중간 가벼운 접촉사고로 차가 막히긴 했지만, 해 떨어지기 전에 서울에 도착했으니 어느정도 선방한 셈. 짧은 1박 2일이었지만 좋은 사람들과 알차게 놀고 먹었다. 강릉만 가면 비가 오던 나의 징크스가 깨졌으니, 강릉의 조용한 해변들을 자주 찾아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