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여행 아니고 우정여행입니다만
친구의 갑작스러운 여행 제안에 내 머릿속을 스치는 단어는 오직 하나, 휴양이었다. 말 그대로 쉼을 통해 나를 보충하는 시간. 끼니를 거를 만큼 일에 치이거나 저녁이 다 되도록 회사를 벗어날 수 없는 팍팍한 일상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짬짬이 넷플릭스를 보고, 친구들을 만나 맛집을 가고, 주말엔 허리가 뻐근하게 늦잠도 잔다. 그런데 도통 이 서울 하늘 아래에서는, 쉬어도 쉬는 것 같지 않을 때가 많다.
쉬기 위해 쉬는 것은 때때로 또 다른 피로감이 된다. 쉰다는 명목으로 하루 종일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다 어두워진 창 밖으로 눈을 돌렸을 때,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그 미묘한 자괴감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이불 밖으로 나가지 않는 스스로를 대견해할 수 있는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었다.
숨 막히게 더웠던 7월에 질러버린 티켓이, 9월의 서늘한 바람에 실려 내 손에 들어왔다. 티켓을 받아 들고서야 떠난다는 게 실감이 났다. 비행기 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로망이 끼어들기엔 팍팍했던 일상을 뒤로하자니 묘한 후련함이 밀려왔다. 가즈아!
토요일 서너 시의 공항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고작 한 시간만에 체크인부터 면세점까지 클리어 완료. 산더미 같은 면세품을 일일이 뜯어 캐리어에 차곡차곡 쌓아 넣는 외국인 관광객들만이 분주할 뿐이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서도 탑승까지 한 시간이나 남았으니, 주말 인파에 대한 호들갑이 무색했다. 탑승동 라운지엔 나와 친구, 그리고 햄버거를 먹고 있는 외국인 청년 한 명뿐이었다. 저 외국인은 롯데리아가 맛있어서 먹는 걸까?라는 시답잖은 추측은 우리의 여유를 보란 듯이 낭비하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
우리의 비행기는 해가 진 캄캄한 하늘을 거침없이 날아올랐다. 좌석 시트를 바짝 당긴 정자세로 마찰음을 듣고 있다 보니 창 밖의 인천은 어느새 미니어처 모형이 되어있었다. 저가항공 비행기 좌석엔 모니터가 없다. 자칫하면 대여섯 시간을 명상으로 때워야 한다. 미리 챙겨 온 노트북으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과 <우리도 사랑일까>를 다시 봤다. 사실 이 영화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돌려보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츠네오가 오열하는 마지막 장면처럼, 가슴을 쿡쿡 찌르는 몇몇의 순간들이 자꾸 이 영화들을 다시 찾게 한다. 너무 현실적이지 않으면서 너무 이상적이지도 않은,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할 것만 같은 사랑 이야기.
- 우리 비행기는 곧 코타키나발루 국제공항에 착륙합니다.
영화의 여운이 노곤함으로 바뀌어갈 때쯤, 기장의 목소리가 적막한 공기를 뚫고 나왔다. 기지개를 켜고 마른세수를 하며 내릴 준비를 했다. 현지 시간 11시 35분, 5시간 반 만에 코타키나발루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몇 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있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비행기를 내리자마자 몰려오는 피로에 일 초라도 빨리 공항을 빠져나가야 했다. 하지만 입국심사대 앞에 줄지어 선 사람들의 표정만으로는 어디가 가장 빨리 줄어들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일단 대기 인원 수가 가장 적어 보이는 줄에 섰다. 그. 러. 나. 이 줄은 유난히 처리 속도가 더뎠고, 정신 차려보니 우리보다 더 뒤에 서있던 사람들은 다른 줄로 이탈해 이미 심사를 받고 있었다. 결국 텅 빈 심사장을 마지막까지 지켜낸 우리. 가장 먼저 공항에 도착해 가장 늦게 공항을 빠져나가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라면 경험이려나.
지루한 대기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유심칩 덕분(?)이었다. 한국에서 중고거래로 미리 구매한 말레이시아 유심이 말썽이었는데, 인식은 잘 되면서 정작 데이터는 하나도 안 터지는 게 아닌가. 빵빵하게 터지는 공항 와이파이가 없었다면 내 복장이 먼저 터져버렸을지도 모른다. 네이버 블로그를 샅샅이 뒤져 찾아낸 고장의 원인은 놀랍게도 기간이었다(!) 공항에서는 파는 유심의 25~30GB 대용량 데이터는 이용 기간이 고작 일주일이라는 놀라운 사실. 일주일 후에는 데이터 속도가 아주 많이 느려지고(구글 접속하는데 5분 넘게 걸림) 오래 쓰려면 처음 구매할 때 미리 기간을 연장해야 한다. 파신 분이나 나나 이런 함정을 몰랐던 것. 실제로 공항에서 새 유심을 구매할 때도 이에 대한 안내는 전혀 없었다. 알아서 잘 챙겨야 한다는 것. 말레이시아 유심 중고 거래할 땐 기간을 꼭 따져봅시다. 기왕이면 새 거 쓰는 게 정신건강에 좋고요.
요즘 현대인들은 밥심이 아니라 데이터심으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데이터가 콸콸 터지는 새 유심을 장착하니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말레이시아에서 우버를 몰아냈다는 그 그랩(!)을 드디어 설치했다. 이 새벽에 숙소까지 어떻게 갈까 고민이 많았는데, 첫날 묵은 에어비앤비 숙소의 호스트는 "여기서 그랩 많이들 써~ 안전해~"라고 나를 안심시켜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공항 근처엔 까만 택시 아이콘이 득실득실했다. 이용 방법은 아주 심플하다. 목적지를 설정하면 알아서 요금을 계산해주고, 현금으로 낼지 카드로 결제할지 선택하면 끝. 카드를 등록하면 현금 결제에 비해 2~3링깃 정도 더 저렴하게 탈 수 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털릴지 모르는 카드 정보를 함부로 입력하기가 영 찜찜해서 여행 내내 현금 결제만 한 건 함정. 드라이버와 채팅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위치를 파악할 때도 실시간 번역이 제공되어 굉장히 편리했다. 무엇보다 드라이버들의 타이핑 속도가 그냥 서있는 나보다 빠른 게 인상적이었다. 답변 템플릿이라도 있는 걸까?
"왜 이렇게 안 오지?"
매칭 된 그랩 드라이버를 목 빠지게 기다리는 동안 일반 택시 드라이버로 보이는 사람들이 웨얼아유 고잉? 택시? 하며 우리의 관심을 끌었다. 피곤했던 우리는 그랩을 띄운 스마트폰 화면으로 대답을 대신했는데, 우리에게 말을 건넨 사람 중 하나가 우리를 찾지 못해 헤매던 바로 그 그랩 드라이버였다. 까딱했다간 못 만날 뻔했네. 서둘러 올라탄 그의 차에선 터보의 검은 고양이 네로와 김종국의 사랑스러워가 울려 퍼졌다. "네가 터보를 어떻게 알아?" "런닝맨!" 와, 나도 안 보는 런닝맨을! 드라이버는 "내일 어디가? 관광할 거면 내가 데려다줄게!"라며 우리를 열심히 영업했다. 그러나 민망하게도 정말 무계획 그 자체였던 우리. 섣불리 확답을 주진 않았지만 예의상 카톡 아이디를 교환했다. 생각해보니 에어비앤비 호스트도 먼저 카톡 ID를 물어보던데, 확실히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여행지인지라 곳곳에 한국인 패치가 되어있다. 혹시 노래 선곡도 패치의 일환이었다면, 블랙핑크나 방탄소년단을 추천해줄걸 그랬네.
3만 원짜리 에어비앤비의 가성비는 가히 극강으로 잠만 자고 나서기엔 아쉬울 정도로 넓고 쾌적했다. 건물 자체가 굉장히 큰 신식 오피스텔이었는데, 1층 로비에 에어비앤비 사업 지원에 대한 광고 표지판이 있었던걸 보면 다수의 소유주들이 실제 거주보다는 이렇게 활용하는 듯하다. 무엇보다 가장 좋았던 건 24시간 식당. 공항에서 편의점 들를 생각조차 못한 우리에겐 완벽한 오아시스였다. 비록 메뉴판이 전부 말레이시아어였고 재료 소진으로 안 되는 메뉴가 많긴 했지만 새벽 1시 넘어 찾아간 걸 생각하면 오픈 그 자체로 땡큐지 뭐. 사알짝 밍밍한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들이키니 새삼 행복이 멀리 있지 않았다. 사진 속 100PLUS는 이온음료 2%에 탄산을 첨가한 어색한 맛이다(저때 이후로 다시 사 먹지 않았음). 구글 번역기를 써가면서까지 주문을 하였으나 원인을 알 수 없는 커뮤니케이션 미스로 수북이 쌓인 치킨 볶음면 두 그릇을 받아 든 우리. 말레이시아 인심 한번 넉넉하네. 걱정스러운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소녀 종업원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어색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고 음료 한 입 볶음면 한 입. 말레이시아의 첫 끼는 단짠단짠이었다.
* 묵었던 숙소는 여기
https://www.airbnb.co.kr/rooms/24112027
식당에서 계산을 마치고 거스름돈을 받고 나니 모든 종류의 지폐가 모였다. 지폐 수가 늘어나 지갑이 두둑해지니, 처음 환전했을 때보다 적은 금액인데도 왠지 부자가 된 것 같았다. 현금이 점차 사라져가는 한국과 달리 오랜만에 느껴지는 아날로그적인 감성은 덤. 우리나라와 달리 모든 화폐에 동일한 인물이 찍혀있는데, 말레이시아 독립 후 초대 총리를 지낸 툰구 압둘 라만이라는 인물이라고 한다. 말레이시아 화폐 단위는 링깃, 1링깃은 약 250~270원 사이라 300원으로 계산하면 편하다. 다만 디자인이 모두 똑같아 지폐 색만으로 단위를 구분하기가 익숙지 않기 때문에 계산할 때 제대로 내고 있는지 한 번 더 확인하는 게 좋다. 특히 어두운 택시 안에서는 더더욱! 이때만 해도 돈이 남을까 걱정했는데, 3박 5일 일정에 15만 원을 환전해서, 추가로 두 번 더 환전을 했다(털썩) 자세한 탕진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