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울 땐 더운 나라로,
코타키나발루(3)

샹그릴라 탄중아루에서의 하루

by 자몽맛탄산수

늦게 일어나도 괜찮아

여행 피로가 은근했던지, 와인 한 두입에 눈꺼풀이 무거워져 일찍 잠들었던 어젯밤. 오늘 하루는 리조트에서 아주 게으르고 여유 있게 보내기로 했기 때문에 핸드폰 알람이 아닌 배꼽시계에 맞춰 일어났다. 꽤나 정확한 배꼽시계에 8시가 조금 넘어서 눈을 떴다. 폭신한 이불 위에서 발가락을 꼼지락대니 세상 행복이 멀리 있지 않다. 너무 배가 고파져서 이 행복이 깨지지 않게, 적당히 밍기적대다 조식을 먹었다. 클럽 룸은 비 클럽 룸 사람들과 함께 먹는 공용 조식과 클럽 룸 투숙객만을 위한 조식 두 가지를 모두 이용할 수 있다. 이 날 아침엔 공용 조식을 먹었는데 오랜만에 먹은 오트밀 죽밖에 생각나지 않는 걸 보면 무난한 메뉴에 무난한 맛이었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조식을 먹고 또 먹어도 시간이 남아도는 그 여유의 맛이 가장 달콤해 나머지를 다 까먹어버린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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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장에 몸을 담그니 마치 바닷속에 들어간 기분이 들었다


작지만 알찬 수영장

어젯밤에 잠시 들렀던 수영장이 분위기를 흠뻑 머금었었다면, 오전의 수영장은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썬베드 위에서 몸을 푸는 사람들, 무리를 나눠 비치볼을 하고 있는 가족들, 한 손에 쟁반을 받치고 분주히 돌아다니는 종업원들까지. 수영장 풀은 어린이 풀과 성인 풀 두 개가 있는데, 오른쪽 사진에서 왼쪽 다리를 넘어가면 수심이 낮은 어린이 풀로 이어진다. 성인 풀은 반드시 구명조끼를 착용해야 들어갈 수 있는데, 우리가 도착했을 땐 이미 구명조끼가 동이 나있었다. 오전에 제대로 수영을 즐기고 싶다면 조금 서두르는 게 좋을 듯하다.

이 곳 수영장은 제법 많은 것들이 갖춰져 있다. 리조트 기준으로는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리조트 수영장을 처음 가본 나에겐 "이런 것도 있구나?"싶었던 것들. 수알못을 위한 구명조끼, 온몸을 다 덮을 수 있는 매우 큰 블랑켓(밤에 수영할 때 정말 유용하다. 따로 가져간 워터 타월은 쓸 일이 없었다), 유아들을 위한 소형 풀장, 캐리비안베이의 1/3 정도 크기의 물 미끄럼틀과 내 한 몸 정도는 충분히 적실 작은 물벼락 바스켓 등으로 꾸며져 있는, 동심으로 돌아가기 딱 좋은 놀이시설까지. 작은 면적이지만 실속 있다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수영장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실속 있을 뻔한 것은 바로 선크림. 몸에 바르는 선크림을 챙겨가지 않았던 친구와 나는 별생각 없이 가벼운 수영복 차림으로 하루를 보냈는데, 짐을 다 챙겨 돌아갈 즈음에야 공용 선크림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 이거 바를걸"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 우리는 멀지 않은 미래에 "하 그거 무조건 발랐어야 했는데"하고 크나큰 후회를 하게 된다. 선크림을 공용으로 가져다 놓은 이유를 굳이 몸으로 배운 우리. 코타키나발루의 햇살을 한국의 그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가는 정말 큰 코를 다친다. 이 곳에 왔다면 선크림은. 반드시. 발라야. 합니다. 꼭.


푸짐한 과일 한 상이 만원도 안하는 이 곳은 파라다이스


내 맘 같지 않은 물놀이 - 1

기다렸던 구명조끼를 입으니 천군만마를 얻은 듯 자신감이 솟아올랐다. 수영이라곤 1도 할 줄 모르지만 일단 물에 몸을 맡기고 손발을 휘적거리다 보면 금세 수영장 반대편에 도착하니 재미가 없을 수 없다. 수영 별거 아니네? 수영장 라인을 따라 뱅뱅 돌다가 지칠 즈음에, 무심코 물 위에 둥둥 누워 하늘을 바라본다. 고개를 살짝 젖히면 두피까지 전해지는 차가움.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청량함. 수영이 휴양과 잘 어울리는 운동이었다는 걸 다소 늦게 깨달은, 운알못 한 명. 한국에 돌아가면 제대로 수영을 배워서 나중엔 구명조끼 없이도 자유롭게 헤엄쳐야지- 다짐을 했다.

프라이빗 비치를 석양 관람용으로만 두기엔 아까운 일인지, 매일 오후엔 수상 액티비티 체험을 제공한다. 이 날은 카약패들보드 두 가지. 카약은 생각보다 무겁고 힘이 많이 드는데 재미가 없어서 금방 내리고 싶었다. 노를 저은 지 열 번도 안돼서 "하지 말걸"이란 생각이 들었다. 패들보드는 균형 잡기가 생각보다 무섭고 위태로워서 금방 내리고 싶었다. 꼬마 외국인 친구가 보드 위에 서서 여유롭게 패들을 젓기에 별거 아닌 줄 알았던 우리는 보드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부들부들 떨었다. 뭐든 쉬워 보인다고 만만하게 볼 일이 아닌 것이었다.

패들보드에서 진을 뺀 우리는 근처 레스토랑에서 간단한 과일을 시켰다. 정말 편리하게도, 선베드 곳곳에 걸려있는 메뉴판을 들고 근처에 상시 대기 중인 종업원에게 주문하겠다는 강렬한 의지의 눈빛을 보내면 우리가 있는 곳으로 주문을 받으러 온다. 하지만 웬일인지 우리의 과일은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고, 미리 예약해둔 패러세일링 시간이 점차 가까워졌다. 하는 수 없이 과일을 받자마자 다시 레스토랑에 맡겨둬야 했다. 실컷 재촉해놓고 다시 맡겨두는, 살짝 진상 같은 우리의 부탁을 종업원들은 친절하게 받아주었다. 고객 만족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정말. 물론 "안 먹고 왜 다시 맡기지?" 하는 의아한 표정까지 숨기진 못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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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 같지 않은 물놀이 - 2

리조트 안에 있는 "스타마리나" 센터에 가면 패러세일링이나 카약 등과 같은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다. 메뉴를 보고 창구에 문의한 뒤 예약하면 끝. 리조트 밖에서 하는 게 더 저렴할 수 있지만 귀찮음이 돈보다 값진 우리는 간편하게 이 곳에서 즐기기로 했다. 패러세일링은 인당 삼만 원이 조금 넘는다. 참고로 스타마리나 센터 안에서 수영복이나 물안경, 스노클과 같은 물놀이 장비도 팔고 있으니 깜빡한 게 있다면 이 곳을 찾는 게 좋겠다.

패러세일링 장비는 생각보다 허술(?)했다. 보트를 타고 질주해 바다 한복판에 도착하면 거대한 천막을 펼쳐 바람을 채워 넣는다. 천막에 바람이 잘 들어가 동그랗게 펴지면 그 아래로 들어가 두꺼운 끈들 사이로 다리를 밀어 넣는데, 그 끈들이 풍선을 따라 팽팽하게 펴지면 상공에서 의자와 같은 받침대 역할을 한다(사실 타기 전까지는 실제로 의자가 있는 줄 알았음). 살짝이라도 움직이다가 다리 한쪽이 빠지는 순간 그대로 죽겠구나 싶어 패러세일링도 얼음 자세로 즐긴 나. 나중에 직원들이 찍어준 사진을 보니 당장 황천길에 올라도 어색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올라가기 전에 직원들이 "퐁당퐁당?"하고 물어보는데, 물에 담가줄까?라는 뜻이다. 오케이 하면 오른쪽 사진처럼 물에 퐁당 담가주는데, 시퍼런 바닷물에서 무시무시한 물고기가 튀어나오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조금 무서웠다. 뭐든 재밌어 보인다고 만만하게 볼 일이 아닌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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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놀이는 할 만큼 했다. 이제 다시 에너지를 보충할 시간. 맡겨둔 과일을 찾고 내친김에 식사를 주문했다. "바비큐 먹을까, 피자 먹을까?" "음, 고민하지 말고 두 개 다 먹자!" 동남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탄산음료까지 주문하니 식탁이 가득 차는 건 한순간이었다. 정해진 시간 없이, 눈치 볼 것 없이, 먹고 싶은 걸 먹고 싶은 만큼 먹고 싶을 때까지 먹을 수 있는 한가한 오후. 소프트 아이스크림으로 거한 식사를 마무리하니 어느새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구름 가득한 두 번째 선셋

선셋을 보기 위해 프라이빗 비치에 자리를 잡았다. 사진 왼쪽에 보이는 곳이 선셋 바인데, 이미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어 일찌감치 양보했다. 대신 프라이빗 비치 앞엔 선베드가 있기 때문에 누워서 느긋하게 지는 해를 감상할 수 있다. 아쉽게도 구름이 어제보다 더 많아서, 지는 해의 어슴푸레한 윤곽만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하루가 또 가누나.

지는 해의 끝자락을 열심히 사진으로 남기던 중, 한 외국인이 사진을 부탁했다. 보아하니 혼자 온 것 같은 그녀는 얌전해 보이는 첫인상과 달리 포즈에 거침이 없었다. 마치 만화 캐릭터를 방불케 하는 역동적인 포즈랄까. 사진을 다 찍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수줍게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떠난 그녀를 바라보며 엄마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포트 와인과 함께하는 짙은 밤

숙소로 돌아와 깨끗하게 샤워를 마쳤다. 어제 먹다 만 포트와인을 들고 클럽룸 라운지에 자리를 잡았다. 어제는 한 두 모금도 힘들던 와인이 오늘은 술술 잘 넘어간다. 아까 먹다 남긴 과일은 냉장고의 냉기가 더해지자 더할 나위 없는 안주가 되었다. 와인만큼이나 깊은 밤, 와인만큼이나 깊은 속 얘기를 나눈다. 잔이 가벼워질수록, 들어줄 상대를 찾지 못해 묵혀있던 마음속 응어리도 조금씩 가벼워진다. 어쩌면 오늘 하루는, 지금 이 순간을 위한 준비운동이 아니었을까. 젖은 머리가 다 마르도록 우리의 밤은 저물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