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지 않는 전봇대처럼
내가 처음 군에 갔을 때, 나는 참 재밌었다.
훈련소부터 자대 배치까지 모든 과정이 즐거웠다.
이등병 시절에도 늘 웃으며 다녔는데,
그걸 본 한 선임이 말했다.
“이등병이 쪼개네?”
그때 나는 ‘쪼갠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
나무를 쪼개는 것도 아니고 사과를 쪼개는 것도 아닌데
대체 뭘 쪼갠다는 걸까 생각하며,
그 말이 ‘씨익 웃는다’는 뜻이라는 걸 알고는 그 상황마저 재밌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날 밤 내 위로 전원이 집합했고,
웃고 다니지 말라는 엄중한 지적이 내려왔다.
그때부터 나는 웃지 않으려 부단히 애써야 했다.
어느 날은 한 선임이 으슥한 곳으로 나를 불러내 쌍욕을 하며 겁을 줬다.
“야, 이 새끼야!”로 시작하는 거친 말들이 쏟아졌지만,
나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웃음을 참으려 입술을 꽉 깨물어야 했다.
경상도 촌놈인 나에게 서울말로 하는 욕설은 전혀 타격감이 없었고,
내 귀에는 나와 장난치자고 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인상을 쓰며 진지하게 욕하는 그를 보며
‘나를 웃기려고 작정했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제발 욕만 안 하면 좋겠다. 욕을 들으면 빵 터질 것 같아!’
속으로 간절히 외쳤다.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숙인 채 딴생각을 했던 게 주효했다.
물론 변기 닦던 걸레로 얼굴을 맞거나,
총으로 찍히고 정강이를 까이는 일들이
일상처럼 벌어지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것을 좋게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나는 그 안에서 이상하게도 ‘흥미’ 쪽으로 반응했던 편이다.
그래도 나는 참 재밌었다.
심지어 군대 밥도 맛있었다.
원래 대식가 기질이 있었는데, 내 양껏 먹다 보니
식사 후 청소하러 가는 속도를 맞출 수가 없었다.
결국 먹는 양을 조금씩 줄여 식판의 4분의 1만 담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참 신기한 건, 그렇게 적게 먹어도 배고파지는 시기는 이전과 똑같았다는 점이다.
그때부터 먹는 양이 많이 줄었다.
‘똥국’이라 불리던 된장국도,
매일 바뀌는 반찬들도 나에겐 그저 황홀한 식사였다.
이렇게 적고 나니 내가 소위 말하는 ‘고문관’ 같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저 내가 마주한 세상이 흥미로웠을 뿐이다.
군대에는 참 다양한 인간 군상이 있었다.
과장을 보태자면 범죄 집단인가 싶을 정도로
낯선 세계의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는 사람들도 많았다.
평소라면 절대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을 보며,
세상에는 내가 사는 곳과 전혀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실감했다.
경계 근무를 서는 시간조차 나에겐 사색의 장이었다.
뻔한 경치를 보면서도 상상은 멈추지 않았다.
‘저 전봇대는 밖으로 저렇게 튀어나와 있는데 왜 안 넘어질까?
아, 땅속에 보이지 않는 크고 무거운 기반이 있기 때문이겠구나.
기반만 탄탄하면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구나.’
‘전봇대들은 전선으로 다 연결되어 있네.
하나라도 없으면 전기가 끊기겠지?
그런데 왜 전선은 팽팽하지 않고 축 처져 있을까.
아, 여름과 겨울의 온도 차에 끊어지지 않으려 여유를 둔 것이겠구나.’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고,
곁에 있는 전우들과 나누는 대화도 즐거웠다.
세상을 살다 보니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더라.
남들이 다 똑같이 말한다고 해서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다.
앞 목소리가 커서 전부인 것처럼 보일 뿐, 사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훨씬 많다.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을 보면
모두가 엄청나게 잘 사는 것 같아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곤 한다.
군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곳의 모두가 지랄 맞았던 것도 아니고,
모두가 불행했던 것도 아니다.
거기서 박탈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물론 ‘느껴지는’ 마음을 어쩔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어디에나 이런저런 사람과 상황은 존재한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배제할 필요도,
나와 비슷하다고 해서 덥석 좋아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보는 모습은 그 사람의 아주 작은 일면일 뿐이다.
나 외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저 조용히 흘러가게 두자.
그리고 오직 나 자신에게 집중해야 한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내가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면 된다.
성경에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는 말이 있다.
남들이 뭐라 하든, 내가 배우고 확신한 것에 흔들리지 않고 서 있으면 된다.
조금 뒤처지는 것 같고, 조금 앞서는 것 같은 속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세상에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그러니 너무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당신만 유독 이상한 것도, 혼자만 뒤처진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나는… 좀 특이하긴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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