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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렌 Apr 19. 2018

집착할 용기

슬로우 TV 그리고 리틀포레스트는 무엇을 반영하는가

먼저 집착이라는 단어를 다시 정의해보자. 여기서 말하게 될 집착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갖는 부정적인 느낌은 모두 지우고 대상에 얼마만큼의 관심과 마음을 주느냐에 한정한 의미라고 이해하고 시작하면 좋겠다. 사실 더 좋은 단어가 있으면 하지만 나로서는 찾지 못했다.




모두의 삶에 한 가지의 집착만 있는 세상을 상상해보자. 그 집착의 대상은 사람일 수도 사물일 수도 혹은 어떤 신념일 수도 있다. 이런 상상이 전혀 낯설지만은 않은 이유는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고 지내왔기 때문이다. 가령, 평생 자신의 꿈을 쫓아다닌 사람의 이야기, 평생 한 사람만을 바라보는 순애보 같은 흔한 이야기 말이다. 그리고 보통 우리는 이런 이야기들에서 낭만성을 발견하고 매혹된다.


그리고 다시 우리가 마주한 삶을 상상해 보자. 실제 요즘 우리의 삶은 보통 훨씬 더 많은 집착의 대상들을 갖는다. 가령 물건에 대한 집착, 사람에 대한 집착, 가치관에 대한 집착, 집착의 종류는 많다. 이런 집착들을 한 꺼번에 가지기도 하지만 좀 더 흥미로운 관점은 한 집착이 다른 집착으로 대체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다.


가령 한 사람에 대해 시작되었던 집착은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교체된다. 한 물건에 대한  집착은 이 물건에서 저 물건으로 교체된다. 우리는 수 많은 집착들을 교체해가는 세상속에 살고 있다. 이쯤에서 우리가 처음 상상했던, 한 가지에만 집착하는 인생의 모습을 우리 삶에 반영해 보자면 우리는 여러 사람의 삶을 사는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건 단지 상상이 아니다. 요즘의 문화는 너무나 빠른 속도로 변한다. 어린 시절 살던 세상과 어른이되어 마주한 세상은 다르다. 그리고 이제는 불과 몇 년전의 세상과 지금의 세상이 다르다고 느껴진다. 그럴때마다 우리의 관심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교체된다.


연애의 예를 보면,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을때 우리는 흔히 이 사람이 바로 내가 찾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 감정에 좀 더 취하면 이 한 사람이면 될거 같다. 이 사람하고 맺어지기만 한다면 다른 것들은 다 내어줄 것 같다. 하지만 이뤄지지 않아야 첫사랑 아닌가. 우리는 좌절 앞에 고개를 숙이지만 시간의 치유속에 다시 힘을내어 새로운 대상을 찾는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낸 새로운 대상에서 끝난다면 다행이지만 보통은 수 차례 반복된다. 그것이 요즘의 연애이다.


물건도 마찬가지다. 처음 구입해서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스마트폰이 어디로 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처음에는 행여 상처라도 날까 각종 필름으로, 케이스로 둘러 싸지만 어느 시점 이후에는 그냥 쓴다. 그리고 관심은 새로운 폰으로 이동한다.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새로 구입하면 그만이다. 요즘 만큼 특정 용도에 특화되어 상품이 개발되는 시대도 없다. 모두 용도에 맞게 구입했으니 모두 잠깐씩 쓰고 잠깐씩 관심을 주면 그만이다.


가치관의 변화도 비슷하다. 누군가의 인생은 가부장적인 세계에서 시작했지만 어느순간 남녀평등이 당연해지더니 이젠 젠더의 경계마저 사라진 세상을 받아들여야 한다. 과거에 이런 빠른 변화를 받아들여야 했던 시대는 당연히 없었다.


집착이, 다시 말해서 한 가지에 꾸준한 마음과 관심을 주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우리의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억들은 모여서 결국 우리의 자아가 된다. 기억이 있기 때문에 나라는 자아에 대한 인식이 존재할 수 있다.  나의 기억들이 없는 나의 자아를 생각해 볼 수 있을까.


우리의 관심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할때 마다, 우리의 집착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할때 마다 우리의 자아는 쪼개진다. 그리고 어느날 수백개의 기억으로 쪼개진 나를 발견한다. 그때 나는 누구인 것일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자아 탐구와 방황을 하는 이유는 모두들 나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모든 원인을 속도의 문제에서 찾아보자. 점점 빨라지는 세상에서 적응하기 어려워 하거나, 문제의식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최근의 페이스북의 잇따른 탈퇴 이슈는 개인정보 유출로 불거졌지만 빠른 정보의 소모에 지친사람들에 의해 지속되고 있다.


노르웨이에는 슬로우 TV라는게 있다. 슬로우 TV를 방영하는 채널에서는 하루종일 평범한 일상을 방송한다. 가령, 기차가 출발 지점에서 종착역까지 이동하는 7시간의 여정을 아무런 여과 없이 7시간 동안 방송한다. 시청자들은 기차 전방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 7시간동안 기차와 함께 달린다. 이 영상은 꽤 인기를 끌어서 노르웨이 인구수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비슷한 영상으로 한 사람이 호수에서 낚시하는 영상을 볼 수 있다. 그 사람이 첫 고기를 낚기까지 3시간이 걸린다. 사실 슬로우 TV라고 하지만 이것은 슬로우가 아니고 원래의 속도이다.


노르웨이의 슬로우 TV


좀 더 느리게 살라는 말은 진부하다. 하지만 느리게 사는 것과 나의 자아 형성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들여다보면 좀 더 흥미롭다. 당신은 무엇이 되고 싶은가? 그 질문은 당신은 무엇에 더 마음을 주고 집착하고 싶은가에 관한 질문이다. 당신이 집착의 대상을 옮겨다닐 때마다 그 질문의 대답에선 점점 멀어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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