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이하여 좀 더 희망차고 밝은 주제를 다룰 수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요새 관심 가는 내용을 적는 것이 더 솔직할 것 같아서 약간은 덜 밝은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다행히도 아직까진 누구한테서 꼰대라는 얘기를 들어본 적은 없다.
앞으로도 그런 상황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겠지만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꼰대라는 말의 의미가 정확히 뭐고, 꼰대라는 단어가 이렇게까지 자주 쓰이게 된 이유가 뭘까?"
당장 떠오르는 정의는 "나이를 앞세워 상대방을 무시하고 본인을 과시하며 손아랫사람 얘기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 정도이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나도 어디서도 마주치고 싶지 않긴 하다.
그리고 물론 주관적인 해외 거주 경험을 바탕으로 느낀 것이긴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독 이 "꼰대"라는 부류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고 심한 거부감을 표출한다. 대체 왜일까?
그냥 막연히 머릿속에서 표류하던 생각이었는데 최근에 『피로사회』라는 책을 읽으면서 약간은 그 이유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근래에 한번 우울감이 몰아쳤던 적이 있다.
전 직장에서 잠시 왔던 번아웃이란 손놈님이 다시 오려고 하고 있었고, 인간관계도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아서 좌절감을 느꼈던 것 같다.
슬픔에는 슬픈 음악으로, 더운 날에는 뜨거운 국물로 맞다이를 치듯이 피로에는 피로컨텐츠(?)가 딱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책에 손이 갔다.
한병철의 『피로사회』. 표지를 보는 순간부터 매우 피로해진다.
저자는 근대사회를 "규율사회"라고 하는 반면 현대사회는 "성과사회"라고 표현한다.
최근 잘* 돌아가신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에는 밤에 돌아다니지도 말라고 하고 시위도 하지 말라고 하고 참 하지 말라는 것들이 많았다고 한다.
(* 오해 없으시길, 노환으로 편안히 "잘" 돌아가셨다는 의미이다!)
근대에는 규율을 어기는 사람들이 광인 & 범죄자 취급을 받았고 이 광인 & 범죄자들이 사회 시스템을 위협하는 부정성으로 인식되었다. 마치 우리 몸의 면역체계가 각종 질병에 맞서 싸우듯이, 긍정성과 부정성이 맞서 싸우는 "면역학적 특성"이 우리 사회에서 보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차이(성적 지향성, 정치이념 등)가 부정성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고 전통적인 역할(남녀 역할, 직업적 역할 등)의 틀이 깨지는 순간 사회의 "면역체계"가 발동하여 부정성을 때려잡으려 하는 것이 "규율사회"의 생리인 시기였다.
반면 현대사회는 무한 긍정의 시대이다. 우리는 아디다스의 유명한 캐치프레이즈인 "Impossible is Nothing"에 열광하고 학교에서도 아이들에게 "넌 무엇이든 될 수 있다"라고 가르친다. 나도 이게 마냥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왔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시원하게 격려도 해주고 비행기도 한번 태워주고 얼마나 좋은가!
알랭 에렝베르. 이마 한가운데 점이 있어서 그런지 기공포를 잘 쏠 것 같다.
하지만 긍정성의 과잉은 규율사회와 달리 박탈하기보다 포화시키고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시킨다.
그리고 그 포화와 고갈의 과정에서 인간은 극심한 우울감을 느끼게 될 수 있다.
이에 대해 사회학자 알랭 에렝베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울증은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넘어가는 시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실제로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는 통념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좌절을 겪었을 때의 우울감은 흡사 브레이크가 고장 난 8톤 트럭 같이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