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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중인생 Feb 11. 2022

005_[인생&]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며

사랑해요 할아버지.

2022년 2월 7일.


인생은 참 얄궂다.


불과 어제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다.

다행히 증상이 강하진 않아 견딜만한 수준이지만 자가 격리에 들어갔고, 운신의 폭이 좁아져 여러모로 불편하다.


그럼에도 긍정적인 측면은 오랜만에 일을 잠시 내려놓고 푹 쉬면서 인생을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밀린 가계부 정리, 나만의 데일리 루틴 만들기, 사업 구상, 연말정산 등등 만들면 만드는대로 차고 넘치는 게 할 일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망중한의 꽃은 낮잠이다. 오늘 하루도 낮잠을 한두 시간 때렸는데,

슬슬 깨어날 즈음에 핸드폰 진동이 느껴졌다.


어머니로부터 걸려온 카카오톡 보이스톡이었다. 낮잠을 자기 전 이미 통화를 한번 했었기 때문에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좋지 않은 일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고도 있었다.

그게 아니길, 그냥 잘못 눌린 것이길 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향년 89세.

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결혼하실 당시 할아버지 할머니




나의 롤모델.


나는 5살까지 외가댁에서 자랐다.

할머니가 해주신 밥을 먹고, 할아버지 방에서 놀고, 두 분 손 잡고 산책도 다녔다.


어린 나는 특히 할아버지 방을 좋아했다.

엄마한테 혼이 날 때마다 얼른 할아버지 방으로 뛰어들어가면 할아버지께서 문을 걸어 잠그고 나랑 놀아주셨다.


돌이켜보면 할아버지는 내게 일반적인 할아버지 이상의 의미를 주는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있든 내 편이었고 세상 누구보다 재미있었다.


가운데 - 할아버지, 오른쪽 -  할머니


시간이 흘러 초등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친 후 아버지 일 때문에 우리 가족은 독일로 이주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그때도 무엇보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 제일 슬펐던 것 같다.


독일 초등학교로 편입 후 종종 존경하는 인물에 대해 발표하는 숙제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른 친구들이 아인슈타인, 테레사 수녀, 빌 게이츠 등을 소개할 때 난 항상 우리 할아버지에 대해 말했다.


무슨 내용으로 발표를 했는지 잘 떠오르진 않지만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든든하고 재미있는 사람" 정도로 소개했었던 것 같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점점 "존경하는 인물 발표하기"와 같은 숙제들은 없어져갔지만, 귀국 후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생이 되었을 때까지도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할아버지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았다.


어느덧 사회생활 8년 차에 접어들었지만 아직도 할아버지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다.

가장으로서, 직장인으로서, 어른으로서 어깨가 무거운 중에도 항상 온유함과 유쾌함을 잃지 않았던 당신의 성품을 아직도 배우고 있다.


그리고 훗날 나도 손주들에게 비슷하게 기억되고 싶다.

엄마한테 혼날 때면 나타나서 숨겨주는 재미있는 사람,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제일 먼저 소개하고 싶은 사람 정도로.




곤지암 놀러 가서


아무리 생각해도 인생은 얄궂다.


작년 가을 잠시 입국해서 마지막으로 찾아뵈었을 때, 이전과는 달리 날 떠나보내며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 모두 눈물을 흘리셨다. 정말 마지막이라는 느낌이 드셨던 것일까.



그날 할아버지 볼과 이마에 입을 맞추고 사랑한다고 말씀드렸지만 떠나기 전 한 번이라도 더 안아드리고 입 맞춰드릴 걸,


좀 더 사랑한다고 말씀드릴걸.


정신 또렷하실 때 식사라도 한번 더 사드릴걸,


생신날 사랑하는 마음 담아 편지도 쓸걸,


평소에 바쁘단 핑계 대지 않고 더 자주 찾아뵐걸,


인사드릴 때마다 사진이라도 많이 남겨둘걸.


지난주에 괜히 출근하지 말고 재택근무해서 코로나 감염되지 말걸,


입원하시기 전 영상통화 한번 마지막으로 걸어드릴걸,


다 커서 결혼하는 모습도 보여드리면 정말 좋았을 텐데.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만큼 후회도 많이 남는다.

마지막 순간을 함께 지켜드리지 못한 아쉬움도 꽤 오래 남을 것 같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할아버지께서 자랑스러워하실 손주가 되어야겠다는 다짐도 해본다.

그리고 당신이 그러셨듯, 훗날 나도 내 손주들에게 자랑스러운 할아버지가 되고 싶다.



할아버지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시 만났을 때 나눌 얘기 많게끔 재미있게 살게요.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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