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시아에서 산세바스티안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1년간의 어학연수 기간이 끝나가면서 비자 연장을 위한 준비를 조금씩 하고 있던 어느날 장거리 연애중인 그로부터 “너무 힘들다”는 말이 나왔다. 어지간해서는 이런 자기 속 얘기는 안 꺼내는 사람이기에 나도 모르게-아니 어쩌면 어느정도 각오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 내가 여기서 비자 연장하지 뭐. 준비할 시간이 빽빽하지만... 어떻게든 되겠지!”하고 답해버렸다
그렇게 나는 산세바스티안행을 결정했다
그러고보면 나라는 사람은 늘 연애가 우선순위에 오지 못하던 사람이라 이런 결정을 내린 적이 없었다. 심지어 나는 3년간 스페인 어느 도시에서 머물고 언제 뭐를 할지 몇 번이나 생각을 해오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런 나의 계획을 정말 단숨에 바꾸다니! 당신이란 사람, 대단하구나
처음 스페인에 올 때 캐리어 두 개, 중간에 한국에 다녀올 때 캐리어 두 개 분의 짐 추가. 딱히 이 곳에서 옷이나 뭔가의 쇼핑을 많이 하지도 않은 것 같아 짐은 얼추 캐리어 5-6개분 정도 나오려나 싶었는데 이게 웬 걸. 정말이지 택도 없는 생각이었다
택배로 짐을 보낼까 이사업체를 쓸까 고민하다가 두 번에 나눠 직접 옮기기로 했다. 그의 이민가방을 빌려 짐싸기를 마치니 짐은 총 7개였다. 캐리어 두 개로 1년을 나고 있다는 요코가 굉장하다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들었다
정든 방과, 정든 플랫메이트와, 정든 공간과 사람들과 인사를 했다
마지막 끼니는 발렌시아에서의 절친 미아와 함께., 5-6월이 제철인 클로치나(clochina:홍합의 한 종으로 발렌시아 특산물이다)를 먹었다
이제 자주 못본다는 아쉬움에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른 속도로 화이트 와인을 마신 우리는 달큰하게 취기가 오른채 한참 수다를 떨다가 포옹을 하고 헤어졌다
그렇게 산세바스티안
‘미식의 도시’로 알려진 산세바스티안은 스페인의 북부. 프랑스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있다. 조개 모양을 닮아 그 이름이 그대로 붙여진 아름다운 라콘차해변이 있어 여름이면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한다
(사실 여름에만 날씨가 좋기때문에 여름, 초가을쯤까지만 몰린다)
학원을 가고, 도서관에 가고, 집에서 밥을 해 먹고. 종종 그림을 그리고, 가끔 글을 쓴다. 아주 아주 가끔은 책을 읽는다
비슷한 듯 하지만 발렌시아에서의 생활과는 분명 다르다.
일단 외출, 외식이 줄었고 그만큼 집에 있으면서 게을러졌다. 물가가 비싼 산세바스티안이다보니 돈이 지출되는 것에 더 예민하게, 보수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거기에 여기서는 아직 친구를 사귀지 못해 더욱이 나갈 일이 없다. 집에서는 자꾸 침대에 드러눕게 되고 그러면 그 날은 망한거다. 나무늘보처럼 빈둥빈둥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보았던 그를 자주 본다. 그리고는 간식과 야식을 먹는 게 습관이 베어버렸다. 그렇게 나의 나태함과 과식이 만나 살이 찌는 알고리즘이 완성되었다. 아둥바둥 매일 스트레칭을 하고 있지만 부족한 듯 하다
그럼에도 나는 이 도시에 서서히 스며들듯, 그렇게 적응해가고 있다. 적응하지 못하고 발렌시아만 그리워 하기에는 이 도시는 너무 아름다우니깐
야경도 아름다운 산세바스티안. 발렌시아에서 머무는동안 ‘아 예쁘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이 곳은 ‘예쁘다’는 말보다는 ‘아름답다’가 더 어울린다
그렇게 하루 하루가 지나간다. 아름답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