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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SJ Apr 17. 2020

힘들 땐 이 날을 기억해 - Albufera

빠에야의 고향, 스페인 엘팔마르부터 알부페라까지


첫날에는 발렌시아 시내를 둘러봤으니, 이틀 차인 오늘은 근교에 다녀오기로 했다. 목적지는 빠에야(Paella)의 본고장 엘팔마르(El palmar)그리고 옆에 있는 알부페라(Albufera). 지난여름 Mia, Ryan과 처음 가 본 것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편하게 버스를 타고 갈 것이라는 것. (처음 갔을 때는 자전거를 타고 갔다) 발렌시아 시내에서 25번 시내버스를 타고 편하게 갈 수 있다



El Palmar


엘팔마르에 도착해 적당해 보이는 식당에 들어가 빠에야와 샐러드를 주문했다. 음식도 훌륭하고 추천받아 주문한 와인도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엘팔마르 식당의 빠에야는 다른 지역의 빠에야에 비하면 간도 딱 맞고 퀄리티가 높다. 역시 본고장은 본고장인 듯하다





다시 25번 버스를 타고 호수가 있는 알부페라로 간다. 고작 4개 정류장이지만 이런 동네에서는 정류장 간격이 길어 걸어가면 거의 5km 정도의 거리이다. 못 걸을 거리는 아니지만 인도가 없는 길이 대다수라는 것이 더 문제다


저번에는 자전거를 타고 오갔던 터라 사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는 처음 가는 길, 나는 행여 정류장을 지나칠까 봐 단단히 긴장하고 있었다. 구글 지도와 주변 풍경을 번갈아 보며 지켜보다가 '이때다!'하고 벨을 눌렀다. 애석하게도 버스 기사는 벨소리를 못 들었는지 정류장을 하나 지나가서야 우리를 내려줬지만 말이다







아침에는 맑던 날씨가 엘팔마르에 도착한 후로 급격히 어두워지더니 결국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발렌시아는 비 오는 날이 많지 않거늘 왜 하필 오늘 날씨가 이렀는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지난번 알부페라를 왔던 날도 날씨가 참 이상하긴 했다. 나랑 뭐가 안 맞는 건가) 곧 비는 퍼붓기 시작했고, 버스를 타러 정류장으로 뛰어오는 10대 무리는 천둥소리와 쏟아지는 비에 놀라 꺅꺅 소리 지르며 정류장으로 뛰어오더니, 물에 완전히 젖은 친구들의 모습이 재밌는지 한참을 깔깔대며 웃어댔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비 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 안에서 나는 고민에 휩싸였다


'돌아가야 하나. 아쉽지만.... 이렇게 비가 쏟아지면 호수까지 가도 풍경이 별로일 것 같은데' 옆에 서 있는 H를 흘끗 쳐다보니 맞은편 정류장에 있는 학생들의 모습을 흥미롭게 보고 있다. 지금 내리는 비는 소나기인 듯 하지만 소나기가 지나간 뒤 날씨가 어떨지는 가늠이 잡히지 않는다. 하늘은 두터운 회색 구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10분만 더 기다려보고, 빗발이 약해지면 한 번 가보자" 먼저 제안을 한 것은 H였다. (스페인 거주자인) 내심 욕심이 나서 조금 더 지켜보다가 가보고 싶었는데! 하지만 나에게는 사실 손님인 H의 의견이 더 중요했는데, 이렇게 먼저 얘기를 꺼내 주니 끙끙 앓고 있던 고민이 쑥 사라졌다. 우리의 마음을 알아준 것인지 빗발도 조금씩 약해졌다. 끝내 비가 그치지는 않았지만 이제 비를 맞으며 걸어가 볼만한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5분 채 되지 않아 옷도 신발도 완전히 젖었다. 그나마 방수가 조금 되는 외투를 입고 온 게 다행이었다. 코트나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면 애초에 포기를 했을 거다. 외투를 한껏 들어 올려 두루마기처럼 두른 서로의 모습이 왜 그리 재밌던지 우리는 아까 정류장에서 본 10대 아이들처럼 깔깔 웃고 수다를 떨며 길을 걸어갔다. 그렇게 내 스페인 일상 중 가장 즐거웠고 가장 아름다웠던 날이 완성되어 갔다



Albufera



알부페라 호수에 도착할 때 즈음 마침내 비가 그쳤다. 호수 위로 빠르게 걷혀가는 비구름과 조금씩 스며 나오는 햇빛의 모습이 보였다. 거세게 쏟아진 비에 호수의 물 내음은 더 강하게 느껴졌다


"와아..."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우리는 동시에 감탄했다. 빗속을 뚫고 나온 뒤라 그런지 호수의 풍경은 더 장엄한 한 폭의 그림처럼 보였다. 핸드폰 카메라로 찍은 모습이 이 정도이니 눈으로 담은 풍경은 어땠겠는가. (참고로 이 포스트의 모든 사진은 아이폰6S) 버스 정류장에서, 호수로 걸어오면서 한참 수다를 떨었지만 이 곳에서의 우리는 대화를 별로 나누지 않았다. 이 모습을 카메라에, 눈에 담기에 여념이 없었다






"여기 호수 뒷길로 1km 걸어가면 해변이 있는데, 가볼래?"


거짓말이다. 나는 H에게 거짓말을 했다. 구글 지도는 그 길이 1km가 아닌 1.5km라고 했다. 게다가 정확한 길을 표시하지 못했다. 중간에 길을 헤매면 시간도 발걸음도 두 배는 더 들 것이다. 사실은 내가 해변에 가고 싶은 것이었다. 감탄을 자아내는 호수의 풍경에, 바다 풍경은 또 어떨지 너무 궁금했다. 다행히 H도 고개를 끄덕였다



Estany del Pujol


엘살레르(El Saler) 해변으로 가는 길은 다행히 어렵지 않았다. 최근에 설치된 듯한 나무테크로 산책로처럼 길이 이어져 있었다. 산책로는 조류 관찰 지역인 Estany del Pujol까지 이어져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1-2분 정도만 걸어가면 해변이다


비는 완전히 멎었고 하늘도 완전히 맑게 개었다. 한 시간쯤 전에 비가 무섭게 쏟아지던 그 순간이 같은 날이 아닌 것만 같다. 좋았던, 즐거웠던 그 순간들을 행여라도 잊을까 봐 우리는 계속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산책로의 마지막 구간을 빠져나오고 이 곳을 본 순간 다시 한번 할 말을 잊었다. 풍경에 순간 놀라 입도 굳어 감탄사 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스페인에서 처음 본 무지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아름다웠다



"그냥 포기하고 돌아가면 큰일 날 뻔했어"


마음껏 사진을 찍고 난 후에야 우리는 대화를 이어갔다. 이 작은 호수와 주변의 자연이 만들어낸 풍경은 생각지도 못했던 장관이었다. 비가 온 직후라 더 아름다운 풍경이 만들어졌다. 사람 하나 없는 이 곳에 우리는 서 있었다. 몇 마리의 새들이 평화롭게 이 곳을 거닐 뿐이었다


반면 이런 풍경을 본 뒤여서 그런지 엘살레르 해변은 별로 인상적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 날 해변의 모습보다는 해변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H와 같이 해변을 바라보던 '우리'가 더 기억에 남아있다. 잠시 각자의 시간을 가진 뒤 다시 알부페라 호수로 향했다. 노을 지는 풍경을 보고 싶었다. 아름다운 풍경에 눈길을 계속 뺏기느라 이미 계획보다 시간도 다소 지체돼서 일몰 시간에 맞추려면 분주히 가야 할 것 같았다


모래사장을 빠져나오며 H가 말했다. "외국 생활이 쉽지 않겠지만, 외롭고 힘든 날이 있겠지만, 그럴 때는 오늘을 떠올려". 1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이 생활이 먹먹해질 때면 언제나 이 날을 떠올린다



Atardecer


위를 올려보니 이미 하늘은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아직 산책로를 다 빠져나오지 못했는데 해가 많이 넘어간 듯했다. "우리 서둘러서 가야 할 것 같아"라고 말했던 나는 자꾸만 멈춰 서서 하늘을 찍고 있었다. 노을이 중요한가, 이 시간이 더 소중하지





다시 알부페라 호수로 돌아오니 사람들이 꽤 모여 있었다. 아까 전에는 우리 외에는 서너 명 정도가 전부였는데 말이다. DSLR 카메라에 삼각대까지 들고 온 사람도 몇몇 있는 것을 보니, 노을 풍경 스팟으로 유명한가 보다. 그만큼 여기서 보는 일몰은 아름다웠다. 참 예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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