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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SJ May 11. 2020

눈부셨던 5월, 기억의 조각들

그렇게 스페인으로 온 지 1년이 되었다

(2019년 5월의 이야기입니다)



벌써 1년이 지났다. '1년이면 스페인어 대화가 좀 되려나' 싶었지만 룸메이트들과의 대화도 여전히 어려울 때가 많다. 처음 이 친구들과 만났을 때는 "Hola(안녕)" 외에는 거의 영어로만 대화했던 걸 생각하면 이제는 어느 정도 기본적인 대화는 가능하다는 것에 의미를 둬야 할지도 모르겠다.


'1년'을 목적으로 한 스페인행이 아니었기에 이제는 학생비자 연장을 준비할 때가 되었다. 제출할 서류도 많거니와 제출하고 나서 몇 개월은 지나야 결과가 나온다는데,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온다. 고개를 돌려 밖을 쳐다보니 꼭 여름처럼 하늘이 새파랗다. 그러고 보면 며칠 전에는 30도가 넘기도 했었다. 발렌시아의 5월은 봄보다는 여름 같았다.







발렌시아 예술과학의 도시는 관광지 중 하나기도 하지만 이 곳에 실제로 방문하는 사람들은 현지인들이 더 많은 듯하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외관에 그 모습을 보러, 사진을 찍으러 오는 여행자들도 많지만 이 건물들의 속은 공연장, 영화관, 박물관 등 문화시설을 모아둔 곳이니 그럴 만도 하다. 여름이면 한 켠에는 오르차타(horchata/발렌시아 전통 음료로, 츄파를 갈아 만든 시원한 음료다. 맛이 독특해 호불호가 나뉘는 편이며'아침햇살'과 두유 음료의 중간 어디쯤이 느껴지는 맛이다) 파는 아주머니가 나오는데 아직 보이지 않는 거 보니 완전히 여름은 아닌가 보다.







내 사랑 뚜리아 (Turia) 공원도 참 여러 번 갔다. 화창하기 그지없는 날씨에 다들 좋은 자리를 잡느라 바쁘다. 우리나라였으면 나무 그늘 아래 자리만 인기 있었을 텐데, 이 곳 사람들은 햇빛이 그대로 내려오는 곳도 거부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얘기를 나누고, 누군가는 책을 읽고, 누군가는 운동을 하고, 누군가는 잠시 눈을 부치고. 스페인 사람들의 여유로운 모습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곳, 그래서 내가 더없이 사랑하는 곳.







오랜만에 미아를 만나 맥주 한 잔을 마셨다. (4월부터 그러긴 했지만) 테라스 자리에서 맥주를 마시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은 날씨가 되었다. 발렌시아에 1년을 있어보니 정말 '스페인, 아니 발렌시아는 따뜻한 곳'이라는 걸 완벽하게 느낄 수 있었다.


10월까지는 해변에서 놀거나 카페테라스에서 음료를 한 잔 마시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 11월에도 날이 좋을 때면 사람들은 바닷물에 들어간다. -나는 못 그러겠더라- 11월 말쯤 '아 이제 겨울이구나. 테라스에서 햇빛 쬐고 싶은데, 이젠 추워....'라고 느꼈는데 사실 한국에서 경험하던 추위에 비하면 이 곳의 겨울 추위는 아주 작고 귀여웠다. 이곳에도 꽃샘추위가 있는지 2월에는 날이 겨울과 봄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그러더니 결국 3월부터 완연한 봄 날씨가 되었다.


그렇게 1년이 되었다. 나 자신에게 투자하고 푹 쉬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만큼, 이 곳에서 좋은 친구들을 알게 된 그 1년은 참 소중한 시간이었다.







'백수의 삶'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외식은 별로 하지 않았지만 이 곳은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학원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으로 가는 길에 발견한 새로운 아시안 레스토랑, 그곳의 메뉴에는 '베트남 쌀국수'가 있었다. 바르셀로나, 마드리드에 비해 발렌시아에는 아시안 레스토랑이 적어-하지만 차이나타운 규모는 꽤 커서 중식 레스토랑만은 많다. 게다가 저렴하고 맛있다.- 베트남 쌀국수를 파는 집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터였다.


회사 다닐 때는 술을 좀 마신 다음 날이면 근처 쌀국수 집에 가서 뜨끈한 국물을 마시며 속을 달랬는데. 어제오늘 술을 마신 건 아니었지만 그리웠던 베트남 쌀국수를 먹으러 갔다. 맛은 뭐..... 베트남 쌀국수 맛은 맞지만 지극히 평범했다. 그저 1년 만에 이걸 먹었음에 기쁘고 감사할 뿐이다. 참고로 유럽에서 베트남 쌀국수 최고 맛집은 '프랑스 파리'다. 거기에는 베트남 레스토랑 골목이 있다. 참 멋진 곳이다.







언제나처럼 밥은 잘 챙겨 먹었다. 1년 전 E언니가 "너 가면 굶는 거 아니냐"며 걱정하던 바와 달리 나는 삼시 세 끼를 참 잘 챙겨 먹었다. -사실 한국에서 E언니랑 살 때도 세끼를 잘 챙겨 먹었는데, 반찬 한두 개 대충 먹는 내 밥상을 보며 언니는 "그건 밥을 제대로 먹은 게 아니야"라고 말하곤 했다.- 매일 요리를 하니 요리 실력도 조금이나마 늘어서 기쁘다. 어디 가도 굶어 죽지는 않을 것 같다.







발렌시아 해변에는 벌써부터 꽤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나 홀로 해변에 앉아 이 모습을 한참 눈 속에 담았다. 내가 사랑하는 여름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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