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 ㅣ억

자음 에세이

by 김화경

언제부턴가 기억이 가물가물해졌다.


인상 깊었던 일들도 되짚어보지 않으면 그때 있었던 일들이 퍼즐 조각이 되어 시간이라는 판 위에 흐트러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 며칠 혹은 길게는 몇 주 안에 기억을 되짚어보면 완성된 퍼즐을 만들 수 있지만 일 년 정도 지나버리면 퍼즐 대여섯 조각 정도는 사라진다. 어디로 간 걸까?



그런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잊고 싶지 않은 일이 생기면 자기 전에 그 조각들을 하나씩 풀어놓고 머릿속으로 끼워 맞춰 본다. 그날 일어난 일뿐만 아니라 느낌까지도. 손끝으로 느껴진 감촉, 코끝으로 다가온 향, 귓가로 들려온 소리. 그 무엇 하나 놓치고 싶지 않아 기억하려 한다. 하루, 이틀 그렇게 하다 보면 기억하고 싶었던 그날 하루와 관련된 퍼즐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몇 년 전부터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을 기억하는 방법이다.



학창 시절에는 일기를 적었다. 무언가를 기억하기 위해 적은 것은 아니었으나 지금 읽어보면 '아~ 맞아. 이런 일이 있었지.' 하고 기억을 소환해주는 도구가 되었다.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 친구와의 갈등, 좋아하던 사람에 대한 감정. 그 모든 것이 일기장에 적혀있다. 그 시절의 생각과 느낌이 일일이 적혀있기에 일기를 읽을 때면 타임머신을 타고 다시 옛날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


하지만 결혼하고 최근 오 년 전까지 바쁜 워킹맘으로 지내며 일기나 글을 적지 못했다. 안타까운 건 그때부터의 일은 오롯이 내 머릿속의 기억력에만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뭔가 증명해줄 것이 없다. SNS의 사진과 짧은 글만이 언제, 무엇을 했는지 기억나게 도와줄 뿐이다.



그 시절, 내 기억은 열심히 일한 것이 다였다. 일을 마치고 재빠르게 아이를 픽업하고 집에 가서 저녁을 짓고. 잠들고. 다음 날 아침 일어나면 다시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출근하고 아이를 픽업하고 저녁을 짓는 무한 반복되는 삶. 얼마 전, 별다른 기억이 없던 나에게 딸아이가 말했다.


유치원 다닐 때 기억에 남는 일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엄마가 일 마치고 헉헉대며 자신을 데리러 왔을 때라고 말이다. 그때마다 자신에게

"미안해. 많이 기다렸어?"

라고 말했다고.

그 순간, 딸을 제시간에 데리러 가기 위해 헉헉 거린 것을 딸이 고맙게 생각하나 보다 했다.

"엄마가 그랬어?"

"응. 근데 난 그 말이 싫었어."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그 말이 싫었다니.

"그럼 뭐라고 했어야 해?"

"씩씩하게 기다려줘서 고맙다는 말이 듣고 싶었어. 근데 엄마는 미안하다고만 했어."

아이의 기억 속 엄마는 바쁘게 달려와 항상 미안하다고 말하는 엄마였다. 그 말에 나는 또다시 미안하다는 말을 했고, 아이는

"또 또 미안하다고 하네!"

라고 했다.


알고 보니 기억은 일방적인 작업이었다. 같은 일이라도 나와 딸이 기억하고 있는 감정은 달랐다. 고마운 느낌으로 기억할 거라 생각했던 순간은 딸에게 섭섭한 순간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같은 일일지라도 자신의 기억과 타인의 기억은 다를 수 있다. 자신의 기억은 스스로 되짚어보거나 기록해놓을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타인의 기억은 우리가 만들어 줄 수도, 대신 기억해줄 수도 없다.


기억을 소중하게 여기기에, 잊지 않으려 항상 노력했는데, 그러기 전에 상대와 함께 좋은 기억을 공유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게 우선이었다. 조금만 노력하면 최소한 '기억 씨앗'은 좋게 남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별생각 없이 한 우리의 행동과 말 하나가 타인에게 섭섭한 기억으로도 남지 않기를. 오늘도 우리가 주는 좋은 '기억 씨앗'들이 모이고 모여 다른 이들의 삶이 멋진 기억으로 가득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