ㄷ ㅏ름

by 김화경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자신의 생활에 영향을 준다면 더욱 그러하다. 우리 인생에는 수많은 다름이 존재하는데, 그중 오늘 이야기할 다름은 몸 상태의 다름이다.


3~4년 전쯤, 아이와 병원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버스를 탔다. 세, 네 정거장 갔을까? 버스가 정류장 앞에 멈추더니 어쩔 줄 모르는 아이 마냥 앞, 뒤로 왔다 갔다 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창밖을 보니 정류장에 휠체어를 타고 계신 남성분이 있었다. 기사님은 그분을 태우기 위해 버스 위치를 잡고 있는 중이었다.


기사님은 이 정도면 되겠다 생각한 위치에 버스를 세우고 뒷문을 열었다. 휠체어가 올라올 수 있도록 보조대를 내렸지만 겨우 맞춘 위치가 정류장 턱과 높이가 맞지 않았다. 기사님은 보조대를 접고 다시 버스 위치를 잡으셨다. 버스를 조금 더 앞으로 세운 뒤 보조대를 내리니 정류장 턱과 보조대가 퍼즐처럼 딱 들어맞았다. 휠체어를 탄 남성분은 그렇게 버스에 탔다.


남성분은 여섯 정거장 정도 간 뒤에 벨을 눌렀다. 기사님은 다시 정류장에 위치를 잡으시고 뒷문에 숨겨져 있는 보조대 내리기를 두어 번 반복했다. 안전한 위치에 자리를 잡자 남성분은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옆으로 비켜주세요. 휠체어 내려가면 부딪힐 수 있어요."

그분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휠체어가 내려갈 수 있게 작동시켰다. 휠체어는 쓱~ 미끄러지며 바닥으로 내려갔다. 기사님은 안전하게 내린 것을 확인하고는 보조대를 올리고 버스를 출발시켰다.


그때부터 버스 안은 볼멘소리로 가득 찼다.



아니 왜 버스를 타서 바쁜 사람 발목을 잡느냐, 출근 시간이었으면 진짜 화났을 거다. 집에 있지 왜 돌아다니느냐, 딱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 생각도 해야지. 등등. 아이의 귀를 막고 싶은 이야기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듣고 있기 민망할 정도였다.


승차한 곳은 지하철이 없는 곳이었다. 그렇다고 매번 택시를 탈 수도 없을 테고. 부러 사람이 많은 시간에 타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은 따가운 소리를 뱉어냈다.


얼마 뒤 아이와 나는 버스에서 내렸고 아이는 사람들이 너무 한다며 속상해했다. 나는 아이에게 물었다.

"저분은 왜 휠체어를 타고 계신 걸까?"

"태어나셨을 때부터 다리를 못 쓰신 것 같아."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사고로 다리를 못 쓰게 되는 경우도 많아."

"다쳐서?"

"맞아. 다쳐서. 사고는 누구에게나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 엄마도 너도 예외는 없어. 이렇게 잘 걸어 다니다가 다음날 사고로 두 다리를 잃게 될 수도 있어. 태어날 때부터 다리를 못 쓰든, 사고로 그렇게 되든, 그 사람들과 우리는 몸을 쓸 수 있는 상태가 다른 것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태어날 때부터 혹은 사고 때문에 다리뿐 아니라 우리 몸의 일부를 쓸 수 없게 된다면 못 쓰는 것에 대한 절망감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극복하려고 애쓰면 다른 길이 보인다. 그런 것은 어떻게든 본인의 의지로 할 수 있다.


다만 주변 사람들이 바라보는 시선은 본인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런 시선을 무시하고 살아가는 것도 힘들다. 버스에서 볼멘소리를 터트린 사람도 휠체어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고를 당할 수 있다.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자신은 예외라고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자신의 일상과 멀리 떨어져 있으면 온화한 성자처럼 '함께 사는 세상 만들어요.'라고 말하지만, 나 자신이 불편함을 느끼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불만을 표한다. 사실 나도 확신할 수는 없다. 그때 중요한 미팅이 있었다면? 늦으면 안 되는 장소에 가야 하는 경우였다면? 시계를 보며 초조 해했겠지. 더 나아가 '왜 하필 지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


'같이 사는 세상,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해요.'라는 말만 번지르하게 할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있는 생각부터 바꾸도록 노력하자.


우리의 외모, 성격, 주어진 생활환경이 다 다른 것처럼 쓸 수 있는 몸 상태도 다른 것이라고. 그건 다른 것이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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