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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두니 Dec 20. 2020

이 그림의 제목을 붙여 주세요.

관람객이 붙여 준 그림 제목

oil on canvas.  53 ×45.5cm  by duduni


열과 성을 다해 그린 그림이다.

10호 크기의 작은 캔버스지만 손이 많이 갔다. 줄기 하나 꽃잎 한 장도 어려웠지만 밑바탕을 은은하고 몽환적으로 보이도록 연출하는 작업이 힘들었다.


그림이 힘들다는 건 내게는 재미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릴 때마다 처음 그리는 것 같고, 실제로 계속해서 처음 그리는 스타일들이었다. 짙은 바탕에 드러나지 않도록 짙은 풀들을 쌓아나갔다. 어떤 일이든 베이스를 탄탄하게 쌓아둬야 포인트 부분을 명확하게 살릴 수 있다. 줄기의 명도, 채도를 서서히 올려나갔다. 여기저기 리드미컬하게 변주를 하며 지루하지 않은 구성이 되도록 애썼다. 그리고 마지막, 포인트가 되는 꽃잎을 그려 넣었다. 모두 다른 꽃잎, 모두 다른 꽃봉오리..


재미있는 작업이었고, 그리고 난 후의 만족감도 높았다. 그림의 구성 요소가 많다 보니 질감은 최대한 자제했다. 거의 평평할 정도로 매끈하게 그렸고 몇 군데만 질감을 살짝 살렸다. 완전히 마르고 나서 반광 바니쉬(마감재)를 발랐다. 바니쉬를 사용한 유일한 작품으로, 짙은 부분이 오염되면 안 되기에 바니쉬 처리를 했다. 전시 오픈 전날, 그림을 걸고 있을 때 그림 선생님이 몇 년 만에 찾아오셨다. 이 그림만 마감재를 바른 것을 보고는 이 그림에 대한 나의 남다른 애착을 느꼈다고 하셨다.   

   

이 그림을 전시 포스터에 메인 그림으로 실었다.

전시를 할 때 관람객을 위해 간단한 이벤트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벤트의 주인공은 바로 이 그림이었다.

그림의 제목을 관람객이 직접 지어 보는 것! 내가 생각한 제목은 종이로 들춰볼 수 있도록 가려놓았다.

막상 무언가를 지어내라고 하면 너무 막막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잠시 (                    )를 제시해 두었다.


그림을 천천히 감상하던 관람객들은 저마다 그림 앞에 한참 머물며 자신의 제목을 적고 붙였다. 그런 다음 작가의 제목을 들춰보았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다시 한번 그림을 들여다 보기도 하고, 다른 이들이 붙인 제목도 훑어보았다.


관람객들에게 잠깐이나마 전시에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또 자신이 직접 제목을 붙인 그림이라면  더 마음에 오래 남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전시가 끝난 후 내 그림에 붙여주신 제목들을 정리해 보았다.(맨 아래에 첨부) 연세 지긋한 어르신부터 어린아이들까지 손수 적은 필체를 감상하는 것도 즐거움이었다. 하나같이 다 그림과 어울리는 제목들이다.


한 관람객이 붙인 제목이 오래 여운으로 남는다. 제목은 '꽃수레는 엄마품'

그녀는 그림을 보니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고 했다.

"내가 참 좋아하는 꽃인데. 고향 동네의 들판에는 수레국화가 흐드러지게 피었거든. 옆집 아줌마는 수레국화를 꺾어 시장에 내다 팔기까지 했으니까 얼마나 꽃이 많았는지 알겠지? 우리 엄마도 이 꽃을 참 좋아하셨지. 청보라색 수레국화를 보면 내 어린 시절과 우리 엄마가 생각나서... 이 그림을 보니 우리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하며 눈물을 지으셨다.

듣는 나도 덩달아 눈물이 났다.

그 관람객은 바로 우리 엄마였다.

.

.

.


내가 정해 둔 제목은 '잠시 쉬었다 가'이다.

날이 따뜻해질 즈음 산책하는 강가에 가면 수레국화가 화사하게 돋아난다. 그 환상적인 자태에 넋을 놓고 보고 있노라면 수레국화가 말을 거는 것 같다.

잠시 쉬었다 가렴. 그래도 괜찮아.  

 

이 글을 보신 여러분은 어떤 제목을 지어주실지....




관람객이 지어 주신 제목들

*꽃수레는 엄마품

*잠시 거닐다

*요정의 눈

*잠시 머무르다

*어울리다

*잠시 기다리다

*흐드러짐

*잠시 흔들리다

*잠시의 기다림

*잠시 너울거리다

*점점 빠지다

*잠시 혼자만의 시간

*잠시 그리고 오랫동안

*탄생의 숲

*새벽의 정원

*잠시 쉼

*It's so beautiful

*잠시 그대에게

*잠시 바라보다

*잠시 빠지자

*들꽃의 향연

*엉김. 삶의 고통(고뇌), 치열한 삶

*잠시 머물기

*미로

*그분 따라

*잠시라도 피어라...

*잠시 살아있네

*청초함

*꽃이 핀다

*신비

*잠시 편안함

*잠시 풀꽃 되어

*잠시 몽환 속으로

*축제

*잠시 썰물

*생명의 신비

*잠시 누웠다 가다

*잠시 코스모스를 바라보아요

*보이는 게 다가 아닐 때도...

*식물의 꿈틀거림. 내 속의 요동치는 세포들!

*희망을 품다

*토요일 오후 맑은 날 주일학교 교리 시간 후 푸근한 분위기

*자연의 아름다움

*예쁜 꽃이 많이 폈다

*꽃이 반짝 빛난다

*잠시 탄생



https://youtu.be/vbRd6ygUd8g

<바람이 머무는 날>

조수미의 목소리로 이 노래를 들으면 눈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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