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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두니 Feb 17. 2021

봄의 전령사

충격적인 장면을 봤다. 


내게는 봄의 전령사가 있다. 칼바람과 봄바람이 왔다 갔다 하는 이맘때, 무심코 화단 앞을 지나다 보면 언뜻 향기가 스친다. 잊고 있던 옛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달달하고 설레는 향기. 

그 향기에 고개를 들면 딱딱하고 메마른 가지 위에 눈꽃처럼 앉은 매화가 보인다. 

우와!! 

지나다니는 동안 보지도 못했는데 언제 이렇게 폈는지. 홀린 듯이 화단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가 코를 들이대고 향기를 음미한다. 

봄이 오는구나!
by duduni


그랬던 화단의 매화나무가!  

숭덩숭덩 잘려있었다. 

겨울이 시작될 때쯤, 아파트 관리실에서 대대적으로 화단 전지작업을 업체에 맡긴 것이다. 단지 내 방송을 듣고 차를 지하로 옮겼던 터라 생생하게 기억난다. 크레인까지 동원해서 키가 큰 메타세쿼이아부터 작은 나무들까지 전기톱으로 모조리 싹둑싹둑 자르는 걸 봤다. 

아니, 뭘 저렇게 볼품없이 자르는 거야? 

전지작업을 하는 이유가 따로 있겠지만 잘린 나무의 꼴이 여간 보기 싫은 게 아니었다. 그때는 그저 멋지게 뻗어 올랐던 메타세쿼이아를 중간에 뚝 끊어 놓은 것만 눈에 들어왔었다. 내 봄의 전령사까지 무참히 잘렸을 줄은 미처 몰랐던 거다.


세월이 어떻게 가는 줄 모르고 살다가 오늘 쓱 지나가는데, 나무에 허여멀건한 뭔가가 붙어있는 게 아닌가. 

뭐지?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 경악!

매화였다. 고목나무에 매미에도 못 미치는 새똥 정도로 보인 매화 몇 송이. 잔가지가 모조리 잘려나간 매화나무에 겨우겨우 핀 그 몇 송이. 아래쪽의 잔가지는 사라졌으니 높이 뻗은 굵은 가지를 뚫고 나온 것이다.


by duduni
에고, 안쓰러워라. 

하마터면 매화가 피는 줄도 모르고 지나칠 뻔했다.


볼품없이 잘린 나무를 보는데, 어찌나 마음이 섭섭하던지.  너무 높은 곳에 피어 코를 대고 향기도 맡을 수 없었다. 못 오를 나무를 보며 쓰디쓴 입맛만 다셔야 했다. 


<Energy. 꽃방울>  oil on canvas.   by duduni


이 그림은 내 봄의 전령사의 전성기를 그린 것이다. 마침 봄비가 내린 후였다. 가녀린 꽃송이에 빗방울이 맺힌 영롱한 순간을 담고 싶었다. 꽃을 자세히 그리는 건 쉬워 보이지만 막상 그려보면 어렵다. 쓱쓱 쉽게 그리는 이들도 있지만 내겐 공을 많이 들여야 하는 소재다. 


청아하고 깨끗한 느낌을 주고 싶었다. 거기다 맑은 빗방울까지. 

제목은 <꽃방울>

내가 만든 단어다. 

왠지 어울리지 않나?


마음껏 피우지 못한 화단의 매화를 대신해, 이 그림을 들여다본다. 

이 계절, 아직 매화를 만나지 못한 분들이 계시다면 봄의 전령사 꽃방울로 봄맞이하시길.



https://youtu.be/IDI5bDdspc0

<I Love Penny Sue>

영화 Midnight in Paris의 OST.

세느강변을 걷는 듯한 낭만적인 곡이다. 영화도 재미있고, OST도 전곡 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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