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후 한 번도 붓을 들지 못했다. 동화 쓰기에 몰두하다 보니 그림 그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유화는 한번 시작하면 통으로 시간이 필요하다. 공간도 필요하다. 작업실이 따로 없는 나는 거실 한쪽 구석에 전을 펴야 한다. 그런 물리적인 제약들이 골치 아팠다. 그래서 내버려 둔 건지도 모른다.
얼마 전부터 다시 그리고 싶다는 욕망이 들썩인다.
다른 이의 그림에 눈이 가고 손도 근질근질하다. 지금 쓰고 있는 동화를 마무리하면 내팽개쳐뒀던 캔버스를 꺼내봐야겠다. 먼지를 닦아내고 물감을 조몰락거려봐야겠다.
<Energy. 아무도 보지 않아도> oil on canvas. 2018 by duduni
툭툭 쉽게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보기보다 쉽지 않았던 그림 중 하나다. 특별히 참고할만한 자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보통 그림 작업을 할 때는 내가 찍은 사진 중 마음에 드는 사진을 보면서 조합을 하거나 나름의 구도를 짜서 그린다. 사진에서 나만의 그림 포인트를 잡는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은 그럴 만한 사진이 없었다. 이런 느낌의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그린 그림이다. 구도도 색도 노 베이스에서 시작했기에 그림 그리는 과정이 유난히 어려웠다. 결과적으로는 만족한다. 구현해내고자 했던 색감과 느낌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라는 제목의 이 그림을 들여다본다. 작가노트의 내용과 가장 걸맞은 그림이다. 내게는 특별한 그림이다. 나를 모르는 분이 구매한 첫 그림이기 때문이다. 스펙이나 투자 가치 등을 따지지 않고 오롯이 그림 자체를 보고 구매한 것이다. 전시 마지막 날 거의 마지막 관람객이었다.
나는 정식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다. 어떻게 시작할지 몰라 알아보다 문화센터에서 유화를 배웠다. 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집에서 혼자 작업을 했다. 그리면서 스스로 터득하는 방식이었다. 혼자 그림을 그리면서 한 가지 바람이 있었다.
나를 모르는 사람이 내 그림을 사 주면 좋겠다...
그 바람이 이루어진 것이다.
판매된 이 그림을 오늘, 그림 파일로 마주 본다.
처음 그림을 배울 때의 설렘과 작업하며 부딪힌 난관들과 그리는 행위 자체의 자유로움과 다시 맞닥뜨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