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 동네에는 유명한 아파트가 있다. 부실시공에다 학군도 별로인데도 이상하게 인기가 있다. 네댓 블록은 차지할 만큼 대단지로 입주민이 많은 만큼 편의시설도 많다. 교통이 불편하다는 단점도 있었는데 버스 노선이 꽤 생긴 데다 대부분이 자가용을 많이 이용하는 시대여서 교통 이야기는 쏙 들어갔다.
그에 반해 우리 아파트는 외진 곳에 떨어져 있다. 공원과 육군 부대, 공군관사 등을 끼고 있어 세상 조용하다. 공기가 좋고 조금만 걸으면 강변에 갈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초중고가 바로바로 붙어 있고 유해 시설이 전혀 없어 아이 키우기에 정말 좋다. 단점이라면 큰길에서 5분 정도 열심히 걸어 들어와야 하는 것과 편의 시설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슈퍼, 정육점, 세탁소, 미용실이 딱 하나씩 있을 뿐이다.
병원, 약국, 꽃집, 식육식당이 잠깐 있었지만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졌다. 처음 입주하고 몇 년 동안은 택시기사에게 아파트 이름을 대면 십중팔구 "에? 그런 아파트도 있어요?"였다. 배달도 마찬가지다. 아파트 위치를 일일이 설명해야 겨우 물건을 받을 수 있었다. 위의 유명 아파트와 가장 비교되는 지점이다.
대중교통 이용이 불편하고 편의 시설이 없다는 이유로 우리 아파트에는 1가구 2 차량이 많다. 뭐 하나라도 사려면 차를 몰고 나가야 한다. 나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캐나다에 사는 셈 치지 뭐. 그런 덴 땅이 넓어서 마트 가려면 무조건 차 몰고 나가잖아.
여긴 자연에 둘러싸인 캐나다라고.
이렇게 자진 세뇌를 했다.
당시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우리 동네에 빵집 하나 있으면 좋겠다."였다. 카페, 분식점, 과일 채소 가게도 있으면 매일 이용할 텐데... 이런 가게에 가려면 차를 몰고 옆 동네 그 유명 아파트 상가로 가야 했다. 그중에서도 자주 이용하는 상가는 왕복 2차선 좁은 길에 있었다. 차를 몰고 가면 주차할 데가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워낙 복작대는 길이라 단속도 심했다. 상가 주차장은 늘 만원인 데다 주차장이 없는 가게도 많았다. 비상등을 켠 채 잠깐 세우고 얼른 사서 튀어나와야 했다.
이러니 어디 정이 가나.
자주 이용하는 길이었지만 당최 정이 가지 않았다. 볼일만 딱딱 보고 나오는, 필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이용하는 그런 길이었다.
어느 비 오는 날, 빵을 사러 이 길로 들어섰다. 비가 와서인지 웬일로 오가는 차가 없었다. 천천히 주차 자리를 살피는데 앞유리 쪽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뭔가 싶어 고개를 빼 전방을 살펴봤다.
아! 전에는 미처 몰랐다. 이 길은 양쪽에 늘어선 나무가 잎을 드리워 완벽한 그늘을 만드는 나무 터널길이었던 거다. 바쁘게 지나다니느라 나무에 눈이 간 건 처음이었다.
이 나무 터널의 천장으로 자잘한 햇빛 조각들이 비쳤다. 구름은 해의 빛을 다 가리지 못했다. 제 아무리 비구름이라도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밝은 빛을 막아내진 못했던 거다. 양쪽에서 뻗어 올라온 나뭇잎은 가운데 지점에서 만나, 서로의 생존 거리를 지키며 빛 구멍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비와 나뭇잎과 조각 빛의 조화!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자 조각 빛도 따라 흔들렸다. 그곳에서 영롱한 반짝거림이 내려온 것이었다. 나무 뒤에 배경처럼 서 있는 건물들은 차창을 타고 내려가는 빗줄기에 어른거리며 녹아내리고, 싱그러운 초록 잎에 흩뿌려지는 빗방울은 경쾌하기까지 했다. 색색의 간판과 멀리 정차한 차에서 나오는 불빛, 가게에 매달린 작은 조명들이 포인트가 되어주었다.
그 찰나의 황홀한 장면을 화폭에 담았다.
오가는 차가 없는 참 드문 그 순간, 삭막한 찻길에서 만나는 아름다운 조합이었다.
<Energy. 빵집 앞> oil on canvas. 90.9 × 60.6 by duduni
정 안 가던 그 복잡한 길, 그저 빨리 이용하고 지나던 그 길은 그때부터 다른 의미가 되었다. 무의미했던 길이 내게 영감을 주고 내 그림 속으로 들어옴으로써 특별한 길이 된 것이다.
이 세상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순간 중 한 순간, 한 공간, 한 사람이 하나의 의미로 다가오는 데에는,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만으로 충분할지 모른다.
그렇게 많이 지나다니면서도 시종일관 무관심했던 대상이 순간의 스파크로 유의미해진다니. 이런 것을 인연이라 부르는 걸까.
지금 우리 동네에는 빵집과 카페가 한두 군데 들어섰다. 그래도 가끔은 인연이 된 저 길에 갈 일이 생긴다. 나무 터널을 지날 때면 머릿속에 이 그림이 떠오른다. 내게 특별한 의미가 된 이 길에는 여전히 주차할 데가 없다.
<공드리>
- 혁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