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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두니 May 17. 2021

봄날이 간다

봄날이 간다.

평범한 나의 나날을 풍성하게 치장해주었던 봄꽃이 졌다.

나풀나풀 눈처럼 나린 벚꽃잎, 쭈글쭈글 말라붙은 철쭉 꽃잎, 후두두 떨어져 켜켜이 쌓인 아까시 꽃잎, 들판을 노랗게 물들였다 한 순간에 사라진 유채꽃잎...


꽃이 진 후 여린 잎은 물을 쭉쭉 마셔 초록 초록하고 탱실탱실해졌다. 풀잎은 바람에 넘실대며 파도처럼 춤을 춘다. 푸르른 풀잎의 싱그러움이 반갑지만 마음 한편엔 일찍 져버린 꽃들에 미련이 남아 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금방 헤어진 기분이다.


섭섭한 마음으로 터벅터벅 걷는데 울긋불긋한 색채가 너울거리는 게 보인다. 군데군데 파르스름한 색도 섞여있다. 등갈퀴다. 거기다 수레국화까지.

우와! 드디어 폈구나!

한달음에 달려가 들꽃들을 맞이한다. 서운해하지 말라며 위로하는 듯 소담스럽게 피어 나를 반긴다. 이 꽃들이 있어 당분간 행복하겠거니, 했다.

등갈퀴나물 / 수레국화 by duduni

바쁜 며칠을 보내고 급한 발걸음으로 산책을 나섰다. 며칠 새 너무 많이 펴버린 건 아닐까 생각하며.

어라?

없다!

꽃이 없다. 풀도 없다.

어쩐지 풀냄새가 짙게 진동하더라니. 들판은 파르라니 깎여 있었다. 푸르름으로 부풀었던 들판이 대대적인 정비작업으로 차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산책 길 양쪽 중 넓은 쪽만 싹 없어졌다. 강과 면해있는 기울어진 비탈면만 간신히 살아남았다.


관리하는 측에서 보면 등갈퀴나 수레국화는 그저 잡초에 불과할 거다. 기승을 부리던 날벌레가 왠지 줄어든 기분이긴 하다. 시민들이 많이 이용하는 하천 산책로다 보니 이런 이유로 정비를 하는 걸 거다. 하지만 너무 무까끼하잖아! 너무 매몰차잖아! 갓 피어난 꽃들을 이토록 처참하게 잘라버리다니.


다리를 건너 '고모들'이라 불리는 들판으로 갔다. 원래의 고모들로 말할 것 같으면 강 건너 정비된 길과는 반대로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곳이다. 일전에 올렸던 고라니가 뛰어다니던 바로 그 장소다. 당연히 날벌레도 더 많고, 새와 곤충도 많다. 자연히 피고 지는 들풀도 다양하고 많은 곳이다. 그래서 즐거이 찾던 곳이다.


친근하고 소박한 들풀들 틈에서 '헙!' 외마디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이리스다!

우아하고 귀티가 좔좔 흐르는 아이리스(붓꽃)가 피어 있는 게 아닌가! 어떻게 아이리스가 이 토속적인 들풀 사이에서 피었을까나? (오해 금지 요청. 꽃에 급을 따지는 게 아님. 그만큼 우아하다는 걸 강조하기 위함임을 양해 바람.)


보랏빛 아이리스의 아름다움은 넋을 놓고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햇빛 후광을 받으며 찬란한 보랏빛을 뿜어대는 아이리스의 자태를 캔버스에 담았다.

햇살, 보라, 아이리스, 초록과 더불어 아이리스의 독보적인 기품을 담고자 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꼿꼿한 자존심 같은 거랄까? 그런 도도한 아름다움을 그리고 싶었다.

<Energy. 보물 찾기>  100×80.3  oil on canvas.   by duduni

들판에서 보물을 발견한 기쁨에 보물 찾기라고 그림 제목을 붙였다.

이 보물 같은 아이리스가 그립다. 지금쯤 아이리스가 솟아올라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제 고모들에서 아이리스를 볼 수 없다. 1년 전 원시적이었던 들판을 갈아엎더니 파크골프장이 세워졌기 때문이다. 연두색 철망으로 나누어진 구획 안에는 잔디가 깔리고 딱, 딱 공치는 소리가 들린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파크골프를 치신다.


그 잔디 밑 어딘가에 아이리스의 뿌리가 있을 거다. 억새도 코스모스도 지칭개도 있을 거다. 이 꽃들이 어디든지 비집고 올라오면 좋겠다. 눌리고 밟혀도 지치지 말고 썩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올라오면 좋겠다.


강 이쪽저쪽이 나날이 정비되어 간다. 편편하게 포장된 길은 걷기는 편하다. 내딛는 뒤꿈치를 타고 미미한 충격이 무릎을 치고 지나간다. 더 타고 올라와 마음도 치고 지나간다.

정비된 길을 걸으니 마음이 자꾸만 허해진다.             

  

  

바람과 유채꽃  by duduni

https://youtu.be/vR-UqOPqGzI

 <Aruarian dance>

요절한 천재 프로듀서 Nujabes의 곡이다. 한 번 들으면 헤어나올 수 없는 중독성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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