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두니 Sep 13. 2021

가까이 있어 고마워요

이 그림을 가을에 소개할 수 있어 기쁩니다.

제목은 <Energy. 가을 망우당>


망우당은 공원 이름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망우당 곽재우 장군을 기리기 위해 호를 따서 조성됐고,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던 조양회관이 자리한 공원입니다. 유서 깊은 공원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 의미를 하얗게 잊고 지낸 이유는 우리 집 바로 옆에 있기 때문입니다. 차로 지나기도 하지만 주로 산책할 때 지나는 길목으로, 이곳을 거쳐야 제가 좋아하는 금호강변으로 갈 수 있답니다.


사람이 그렇지 않습니까? 가까이 있으면 소중한 줄 모르지요. 공원은 봄이면 벚꽃으로, 가을이면 단풍으로 아름다워 예전부터 가족단위 나들이나 학교 소풍을 오던 대표 장소였습니다. 예전만은 못하지만 지금도 꾸준히 사람들이 찾습니다. 그런데도 구르기 세 번만 하면 닿는 곳에 사는 저는 굳이 먼데로 꽃구경, 단풍 구경을 갑니다. 아이러니지요.


늘 장난치고 놀려먹는 재미로 만나던 남사친이 어느 날 다르게 보여 심쿵하듯이, 늘 지나다니며 익숙한 이 공간이 어느 깊은 가을날 다르게 보였습니다. 생의 끝을 가장 화려한 색채로 물들이던 나뭇잎들이 어느새 다 떨어져 있었습니다. 나무는 붉게 흐르는 운해에 잠겨 호사로운 대접을 받고 있더군요.


일 년 내내 흙빛 치마를 입었으니 이 가을 며칠만이라도 색깔 고운 롱스커트를 두르게 해 주는 걸까요? 아직 가지에 매달려 있는 색 바랜 이파리들은 먼저 떨어진 언니, 오빠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요. 저렇게 나뒹굴까 봐 두려워할지, 저렇게 예뻐지기를 손꼽아 기다릴지...


듬성듬성해져 틈이 넓게 벌어진 수관 사이로 흐린 하늘이 들여다보입니다. 비 오는 날 먼 하늘이 언뜻 분홍빛으로 보입니다. 마치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처럼 말이지요.


퍼붓는 빗줄기를 따라 나무와 공간이 뒤섞입니다. 희끄무레한 나무줄기는 휘발되듯 공간으로 흩어집니다. 낙엽으로 나뭇잎으로 옆 나무로 배경 속으로... 휘발된 조각들은 빗속에서 즐거이 춤을 춥니다.  


<Energy. 가을 망우당> oil on canvas.  65×53  by duduni


그림을 그리는 동안 마음이 간 곳은 배경이 되는 회보랏빛 숲입니다. 물속에서 방금 떠오른 것 같은 화살표가 가리키는 길 끝, 굽이진 길을 돌아가면 무언가가 나타날 것만 같습니다. 저곳, 회보랏빛 숲으로 들어가면 그리워하던 누군가를 만날 것만 같습니다. 신비롭고 미스터리한 모험이 펼쳐질 것 같기도 합니다. 롱스커트의 색이 바래지기 전까지만 열리는 한시적 미지의 공간이 궁금해집니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파랑새는 집의 새장 속에 있었지요. 슬프도록 아름다운 단풍은 우리 집 바로 공원에 있었고, 굽이만 돌면 나오는 환상의 숲 또한 늘 다니던 길목에 숨어있었습니다.

집 앞, 매일 오가는 길, 익숙한 장소에 꿈꾸던 파랑새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주변의 평범한 풍경도 예사로 보지 않게 되겠지요? 파랑새는 자기를 발견하려는 이에게 날아올 겁니다.

    

붉은빛, 분홍빛, 주홍빛, 노란빛으로 물드는 깊은 가을이 머지않습니다. 가까운 풍경, 익숙한 장소, 길이 든 물건, 편한 사이, 가까운 관계.... 익숙하고 편안한, 가까운 무엇이 있다는 것이 새삼 감사해지는 오늘입니다.  


저의 가까운 브런치 이웃 여러분, 고맙습니다.



제가 애정하는 음악 두 곡을 소개합니다.

저로서는 너무나 많이 들어 무척 가까운 곡이랍니다.

특별히 좋아하는 악기로 연주된 음악입니다.

첫 번째는 반도네온, 두 번째는 클라리넷.

가을과 더없이 어울리는 곡입니다.

진한 가을의 향기에 취해 보시길....


https://youtu.be/OOcEgAeyUiA

 <14 years after>

우리나라 대표 반도네오니스트 고상지의 곡입니다.

가을과 어울리는 반도네온의 음색에 빠져보세요. 바이올린과의 어우러짐이 절묘합니다.

열정에 쓸쓸함 3스푼 추가+ 트렌치코트 입고 낙엽길 걷는데 바람에  머리카락이 눈앞을 어른거리는 느낌입니다.


http://youtu.be/Ppd0qdp6sno

<Twilight time>

덴마크의 모던 재즈 그룹 베르덴스 오케스트라(Verdens Orkestret)의 곡입니다.

앨리스 눌 니케어(Elith Nulle Nykjær)의 클라리넷 소리에 넋을 놓게 됩니다. 아코디언, 기타 반주도 감미롭습니다. 클라리넷은 배워서 가까워지고픈 악기입니다.^^



이전 17화 지금, 잘 살고 있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