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그런 순간을 자주 경험한답니다. 짐작하시겠지만 바로 자연을 마주하는 순간입니다. 자연을 보고 스탕달 신드롬(뛰어난 예술작품을 보았을 때 순간적으로 느끼는 정신적 충동이나 분열 증상)을 느끼는 것이죠.
단순히 '아, 좋다!'는 느낌이 아닙니다. 그 자리에 멈춘 채 숨이 턱 막히고 심장이 두두두두 뛰고 입이 떡 벌어지는 상태지요. 과하다는 거 압니다만 그렇게 느끼는 걸 어떡하겠습니까. 저는 감정 조절에 능하지 못하거든요.
저는 제 눈에 아름답기에 아름답다 한 것인데,
어찌 아름답다 생각했느냐 하시면....
(장금이의 홍시가 떠오르는 분은 이해하실 수 있을...)
여름날 이른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 앞뒤로 창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앞쪽은 남서쪽으로 아파트 앞동이 가로막고 있고 비스듬히 트인 공간으로 전망이 보입니다. 뒤쪽은 북동쪽으로 공원이 있어 사방으로 뻥 뚫려 속이 시원합니다. 뒤쪽에 커다란 통창이 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요.
보통 아침 시간은 일어나자마자 서둘러야 하기에 여유가 별로 없습니다. 이날은 아마 휴일이었을 겁니다. 창 밖을 내다볼 여유가 있었던 걸 보면요. 무심코 창문을 열고 밖을 내려다봤습니다. 그러고는 스탕달 신드롬에 빠져버렸습니다.
<Energy. 오늘도 해가 뜬다> oil on canvas. 116.8x72.7cm by duduni
떠오른 지 얼마 안 된 아침 해가 어슷하게 빛을 뿜고 있었습니다. 햇빛의 각도와 낮은 언덕의 경사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빛의 길이가 극대화되었습니다. 길게 늘어진 빛이 공원에 조명처럼 내리비쳤습니다.
막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햇빛은 바로 일어나 움직이고 싶지 않았나 봅니다. 여름 햇살인데도 아주 따사롭게 느껴졌거든요.
저 멀리 동쪽과 가까운 곳부터 햇살이 뿌려졌습니다. 겹겹이 쌓인 나무 우듬지가 밝고 채도 약한 노란빛을 덮어썼습니다. 햇살은 서쪽으로 푸르스름한 그림자를 기다랗게 드리웠습니다. 나뭇잎 사이사이를 파고든 햇살은 그림자에 자국을 남겼습니다.
밋밋했던 나무들은 햇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입체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시력이 좋지 않은데도 활엽수 나뭇잎 한 장 한 장, 침엽수 잎 한 가닥 한가닥이 되살아나는 게 또렷하게 보였습니다.
그늘이 있어 햇빛 받는 부분이 더 도드라져 보였습니다. 어두운 부분이 있기에 밝은 부분이 더 돋보였던 것입니다.
이런 풍경을 뚝심 있는 심장 박동 유지하며 입 벌리지 않고 볼 수가 있을까요? 재빨리 입을 막은 게 다행이었지요. 환호성에 아침잠 많은 가족들 깨우지 않으려면요.
부유하던 감탄이 서서히 가라앉자 풍경 속에 깃든 이야기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 찾아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말이지요.
나무는 키가 크거나 작고, 무리 지어 있거나 외따로 떨어져 있습니다. 어느 하나 같은 나무가 없고, 같은 입지조건이 없습니다. 각기 다른 나무 위로 햇살이 빛을 비춥니다. 해의 입장에서는 공평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빛을 받는 나무가 느끼는 건 다릅니다.
고스란히 빛을 흡수하는 나무가 있는가 하면 그늘에서 빛 한 오라기 받지 못하는 나무도 있습니다.
왜 나는 이것밖에 못 받는 거지? 왜 쟤만 혼자 다 누리는 거야?
이런 불평은 인간의 시선일 뿐입니다. 햇빛은 비칠 뿐이고 나무는 그저 거기 있습니다. 나무는 불평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햇빛이 계속 그 자리에 있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해는 궤도를 돌아 방향을 바꾸고 반대쪽으로 나아갑니다. 그늘에 가려졌던 나무는 다른 방향에서 비추는 햇살을 받습니다.
물론 응달에 갇혀 어느 쪽에서도 빛을 받을 수 없는 나무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나무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해는 계속 비칠 것이고 나무는 자랄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로든 옆으로든 어떻게든 그늘을 비집고 자라나 햇살을 받아내고야 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