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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두니 Jul 09. 2021

지금, 잘 살고 있나요?

비 오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시커먼 하늘, 축축한 대기, 쿰쿰한 먼지 냄새.

척척 감기는 옷, 부스스해지는 머리카락, 차츰 젖어드는 신발.

부정적인 감정이 먼저 온다.


나의 비 그림 시리즈를 보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저도 비 오는 거 참 좋아해요!"

반가워하는 얼굴 앞에서 차마 안 좋아한단 말은 못 한다.

그럼에도 비 그림을 그리는 이유가 뭘까?


지금껏 화폭에 담은 비 그림은 모두 창 안에서 내다본 장면이다. 창 안은 나약한 인간이 대자연이 뿌리는 물세례를 피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다. 차 안이든 집 안이든 유리창 안 아늑한 공간에서 소란스러운 바깥을 감상하는 것이다.


인간 생존의 가장 기본인 의식주 중 '주'에 해당하는 지점이다. 여기서 '주'는 집( : 집 주)이 아니라 살다( : 살 주)라는 뜻이다. 비 오는 날 안전하게 살고 머물 수 있는 공간인 유리창 안에 있기에 이런 장면을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등바등 먹고살기 바쁜데 풍경이 눈에 들어올 리 없다. 머릿속이 엉켜있는데 아름다움이 느껴질 리 없다. 온몸으로 비에 맞서고 있는데 남의 사정에 관심이 갈 리 없다.


그럼 내가 먹고 살기 편하고 아무 걱정 없기에 이런 그림을 그리는 걸까?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진 않을 거다. 근심 걱정을 가득 안고 차를 몰고 가는 중이라도 무념의 순간이 있다.

무심코.

무심결에.

문득.

언뜻.

그런 순간을 맞닥뜨린다.


< Energy. 길목>  oil on canvas.  65.1x45.5  by duduni


그 찰나의 순간, 눈앞에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져 있다.

급하게 브레이크를 잡게 만들었던 빨간 신호등 불빛이 크리스마스 전구처럼 반짝인다. 뜨거운 열기로 피하고만 싶던 아스팔트는 뛰어들고픈 수영장 물처럼 일렁인다. 눈길 준 적 없던 플라타너스 가로수는 꽃장식처럼 화려하게 나부낀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세상, 신기루처럼 펼쳐진 판타지의 순간을 남기고 싶었다. 신호등이 파란 불로 바뀌는 순간 사라져 버릴 신기루이지만 이런 작은 장면들이 우리의 일상을 너무 삭막해지지 않도록 해 주는 게 아닐까?

  

온종일 비가 내리는 요즘. 시골에 있는 이모집에 갔던 생각이 난다. 일고여덟 살 때쯤이었나? 여름방학이라 사촌언니들과 같이 우르르 밭에 뭔가를 따러 갔다.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더니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다. 보통 비야 맞는 재미라도 있지만 위에서 내리꽂는 굵은 장대비는 살이 아플 정도였다. 한여름인데도 비에 젖어 몸이 떨렸고 급기야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때 사촌 언니가 커다란 잎을 따서 머리에 씌워주었다. 연잎이나 토란잎이나 호박잎이었을 그 이파리 아래에 들어가니 한순간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늑한 집 안에 들어온 느낌, 보호받는 느낌이 들었다. 우린 각자 이파리를 머리에 쓰고 한 줄로 서서 밭고랑을 내달렸다. 빗소리에 대항하듯 마구 소리를 지르면서. 그제야 깔깔깔 웃을 수 있었다.


자칫 폭우를 만난 악몽 같은 날로 기억될 뻔한 그 순간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만들어 준 건 호박잎 한 장이다.

신기루를 볼 수 있게 해 주는 건 호박잎 한 장만큼의 안정감이면 된다.

그것이 집이건, 차 안이건, 우산 안이건, 처마 밑이건, 겉옷 자락 안이건, 머리 위를 가려주는 누군가의 손이건.

이 중 하나라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잘 살고 있는 것이리라.



https://youtu.be/wrFsC1ldJEc


<IL MONDO> (세상은...)

Jimmy Fontana의 목소리. 영화 어바웃타임 ost.

꼭 영상을 보시길 추천드린다.

명장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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