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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두니 Nov 24. 2021

1년 프로젝트가 망했다

사진 기록

참담하다!

너무도 비통하다.

앙상한 가지를 보는 순간, 온몸의 힘이 빠져버렸다.

1년을 별러 온 프로젝트였다. 하루아침에 이토록 허무하게 망쳐버리다니.


몇 년 전 은행나무 숲을 처음 봤던 때는 여름이었다. 가늘고 촘촘하게 무리 지어 난 숲의 생김새가 생경했다. 이 숲이 늦가을 노랗게 물 드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한 번도 보지 못했다. 11월은 늘 바빴고 그래서 노란 은행잎 볼 기회를 번번이 놓쳤다.


올해 첫 산책을 할 때 결심했다. 이 숲의 모습을 일 년 동안 카메라에 담아보자. 헐벗은 가지부터 잎이 노랗게 물들 때까지 한 해 동안의 변화상을 담아야겠다! 일 년간의 다양한 모습이지만 하이라이트는 누가 뭐래도 노란 은행잎이었다. 봄 여름, 숲에 변화가 보일 때면 사진을 찍었다. 가을을 지나 겨울이 되었고 이제 그 절정의 순간이 코앞에 닥쳤다.


가을에 접어들면서부터 미리미리 자주 은행나무 숲을 찾았다. 다른 나무들이 벌써 단풍이 든 데 비하면 은행나무는 더디게 물드는 편이었다. 며칠 연달아 사진을 찍으며 깨달은 게 있었다. 내가 사진에 담아온 부분은 숲의 왼쪽. 주로 산책을 하는 오후 3,4시쯤엔 오른쪽(서쪽)에서 해가 비치니 숲의 왼쪽이 늘 그늘져 있었다. 사진에 빛이 얼마나 중요한데. D-day가 머지않았으니 완벽한 모습을 담기 위해 이제부터는 오전에 와서 찍어야겠다. 왼쪽(동쪽)에서 빛을 받았을 때 화사하게 빛나는 노란빛을 상상하니 절로 웃음이 났다.


5일 전이었다. 오전 11시쯤 도착했는데 벌써 해가 오른쪽으로 넘어가 있었다.

아, 내가 너무 늦게 왔구나. 좀 더 일찍 와야겠는데?

은행나무는 여전히 푸른 잎에 노르스름한 빛이 살짝 감도는 정도였다. 아직 며칠 여유가 있겠군.


미세먼지로 며칠 산책을 쉬었다. 5일 지났으니 노랗게 됐으려나? 오늘 아침 8시, 둘째가 등교하자마자 바로 출발했다. 한파 주의보가 있다는 뉴스에 롱 패딩을 챙겨 입고 차까지 몰고 현장에 도착했다. 7시 조금 넘어 해가 떴으니 되도록 빨리 도달하는 게 중요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동쪽 숲으로 뒤뚱뒤뚱 달렸다. 아침 햇살이 바닥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림자 사이를 달리는데, 어? 뭔가 이상했다. 그림자 방향이 내가 생각한 방향과 달랐다. 해가 뜬 지 얼마 안 됐으면 정면에서 빛이 비쳐야 마땅한데 오른쪽 4시 방향에서 비치고 있는 게 아닌가! 멀리 은행나무 숲이 보였지만 그림자 방향이 변할리는 없다. 아뿔싸, 내가 방향을 잘못 알았던 것이었다!

동쪽이라 철석같이 믿었던 그곳은 북쪽이었다. 그것도 절대 해가 정통으로 내리쬘 리 없는 겨울 북쪽! 내가 아무리 일찍 일어나 빛의 속도로 뛰어간다 한들 북쪽에서 햇빛을 받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런 멍청!


Stop! 폭주하지 마! 나에겐 아직 중요한 과업이 있다. 작은 실수에 연연하지 말자.

자기반성을 뒤로하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좀 그늘진다 해도 노란 은행잎은 자체로 밝게 빛날 거야. 그래, 그럴 거야. 어서 가자. 패배감을 위로로 애써 감추며 점점 은행나무숲으로 다가갔다.

그. 런. 데! 

하, 불안한 예감은 왜 틀리질 않는 걸까?

휑!!

따스한 노랑이 넘실대야 할 곳이 훼, 휑했다.

노란 은행잎들은 모조리 땅에 떨어져 있었다! 가지는 폭풍을 맞은 것처럼 깨끗했다. 어찌나 대쪽 같은지 이파리 몇 개 달고 있는 나무도 없었다. 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시린 아침, 노랗디 노란 은행잎을 발아래 깔고 서서 망연자실하게 헛웃음을 웃었다.

미친 거 아이가?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자그마치 일 년을 벼르고 벼른 프로젝튼데. 노랗게 빛나는 은행잎을 달고 있는 숲을 찍겠다는 일념 하나로 기다렸는데. 그 허탈감을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었다. 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미룬 탓이다. 미세먼지는 일요일에 잦아들었고 월요일이었던 어제 왔었어야 했다. 날이 흐리다는 핑계로 게으름을 부린 탓이다.

자연의 속도를 무시한 탓이다. 서서히 변하는 것 같지만 하루 밤사이에 급변하는 것이 자연이다. 재작년 팔공산 은행나무의 절정을 잊지 못해 바로 다음 날 다시 찾아갔을 때, 거짓말처럼 앙상하던 가지를 기억하지 않는가. 괜찮겠지, 하며 안일하게 대처했던 탓이다.

싸매고 온 한겨울 롱 패딩은 거추장스러웠고 준비 없이 나온 맨손은 시렸다. 마음은 비할 수 없이 차가웠다.

      

자괴감과 좌절감에 허덕이던 나는 남쪽이라 여겼던 동쪽에서 비스듬히 내려오는 아침 햇살을 받으러 발길을 옮겼다. 바닥에 소복이 쌓인 말간 은행잎이 햇살에 반짝였다. 노란 잎을 달고 있는 몇몇 나무들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예뻤다. 한숨 한 번 내쉬고 예쁜 걸 찍었다. 그 예쁨은 왠지 내 것이 아닌 듯했다. 내가 누리면 안 되는 남의 예쁨 같았다. 객이 된 듯 편하지 않은 마음으로 몇 장 찍고는 터덜터덜 집으로 왔다.


일 년을 꽉 채우고자 했던 이 프로젝트는 여기서 접는다. 실망감이 커서 더는 진행하지 않기로 했다. 은행나무 숲의 겨울 풍경은 삭막할 것이다. 더 기록하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모습일 거다.


오후, 공허한 마음을 추스르러 다른 코스로 걷기로 했다. 발길은 나도 모르게 은행나무숲으로 향했다. 헤어진 연인이 얼마나 잘 살고 있나 확인 사살하는 심정으로 다시 그곳으로 갔다. 혹시 아침에 미처 못 본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구차한 미련도 있었다. 오후의 숲도 마찬가지였다. 이걸로 끝이네. 잘 살아라. 내 올해는 너를 찾아오지 않을 테다. 난 고개를 돌렸다.


돌아오는 길, 시베리아에서 날아온 청둥오리들이 꽥꽥거리고 있었다. 오리털 패딩을 입은 날 보며 눈을 흘기고 있었다. 그 눈을 피해 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끝으로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올린다. 9개월 간의 기록이다.

 2021. 11. 23 씀.                                                                                          

 

<나이테 한 칸 - 고모들판 은행나무숲>  음악: 백예린_November Song.  photo by dudu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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