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를 나 보다 훨씬 잘 두었던 그 동네 형....!
세월이 많이 지나 이름도 잊어버렸다. 아직도 그 동네 부산 당감동에 살고 있을까? 그 형!
나의 아버지는 농부셨다. 지리산 근처 완전 깡촌에서 평생 가족을 위해 농사만 짓다 돌아가셨다. 그런데 1983년 우리 집에 너무나 어마어마한 비극이 찾아왔고 우리는 고향을 떠나 부산으로 이사를 갔다.
나도 이제 40대 가장이 된 지금 당시 아버지 심정이 어떠했을까? 생각하면 그 무게를 가늠하지 못하겠다.
돈도 없고 기술도 없었던 아버지는 돈을 탈탈 털어 방방이(트램펄린) 하나를 구입해서 어린이들을 고객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때 가격이 10분에 100원 정도였던 것 같다. 당시 짜장면 가격이 한 그릇에 500원이었던 시절이다.
나는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를 마치면 곧잘 길가 공터에 방방이 차리고 손님을 기다리는 아버지에게 달려가곤 했다. 그리고 주말에는 아버지를 도와 종일 장사를 같이 했다. 아버지가 사주는 짜장면이 너무 좋았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 옆에 항상 그 동네 한 형이 함께 했다. 몸이 불편하여 학교는 가지 못하는 모양이었고 매번 아버지 옆에서 아버지를 돕거나 짬 나는 데로 아버지와 장기를 두곤 했다. 나도 곧 그 형과 친해졌고 거의 친구처럼 지냈다.
그런데 그 형은 나보다 힘도 세고 장기도 훨씬 잘 두었다. 내 기억으로 나는 그 형에게 전패를 당한 것 같다. 그 형은 뇌성마비로 몸이 불편했지만, 항상 해맑게 웃는 얼굴이었고 나와의 장기에서 이기면 너무너무 좋아했다. 나는 오기가 발동해서 몇 번 더 덤벼 보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당시 아버지 곁에 있어주고 도와주고 함께 놀았던 그 형이 항상 고마웠고 그냥 좋았다. 바로 그 형이 내가 처음 만난 장애를 가진 사람이었다.
이후 아버지는 돈벌이가 시원찮아 방방이를 그만두고, 부산항 8 부두에서 막노동을 하다 이 역시 여의치 않아 할머니와 엄마랑 다시 그곳...... 아픈 기억이 있는 고향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지금 창업을 준비하고 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생각한다. 내가 창업해서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단순 돈만 많이 번다고 내가 하고자 하는 사업이 지속가능할까? 그렇다고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도 않다. 그냥 당감동 그 형과 같은 사람들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와 교육의 기회를 줄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