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보다
열정이 많은 나는 가끔 제풀에 지친다.
그러나 이상적인 나는 어느덧 또다시
번뜩 다양한 경험과 꿈을 원하고 찾아 헤맨다.
다만 그림과 예술에 대하여, 삶의 깨달음에 관하여 추구하고 또 탐색해 간다.
최근 장애를 가진 분들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하게 되었다.
물론, 상당히 조심스러운 생각이었다.
마침 또 어제는 지인을 만나러 가는 길에 우연히 들른 전시장에서
장애를 가진 분이 그린 작품들을 보게 되었다.
그 사실을 몰랐을 때, 상당히 독특하고 날것이다. 순수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던듯한데,
잘하려는 마음보다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이 크게 느껴져서
조금 불편한 감도 있었다.
더 자유롭게 더 날것으로 표현하는 작가가 부럽기도 했다.
나는 요즘 그림을 잘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는 것을 내심 발견했다.
내 안의 불편함들이 가끔은 더한 불편함이 되기도 하고,
내가 몰랐던 것을 깨닫게끔 힌트를 던져주기도 한다.
나도 어릴 때 큰 수술을 해서 장애를 가질뻔한 적이 있다.
그때 당시 정상적인 신체가 되었을 때, 나는 그 감동을 온전히 느낄 수 없었어도
부모님은 그것에 대해 기적이라고 말하곤 했다.
나는 간접적으로 그 당시의 감정을 느끼곤 했는데,
글쎄, 모르겠다. 장애를 가지게 된 나라면 어땠을까. 어떻게 그 기적이 나에게로 와준 걸까.
신체적 장애를 가지지 않았더라도
어떤 측면에서는 나는 조금 모자란 사람이라는
생각을 품고 살아왔던 것 같다.
그래서 나와 같이 조금 소외되고, 못 어울리고, 특유의 냄새가 나거나,
일반적인 행동을 하지 않은 독특한 친구들에게 끌렸고,
마음이 갔던 면도 있었던 게 스스로 묘해서 되묻곤 했다.
'연민일까, 동질감일까?'
그리고 어쩌면 우리 모두가 저마다의 모자란 면을
가지고 있고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나 싶다.
자신의 모자람에서 발견한 아름다움이
내 안에 깊이 수용되고 안착될 때,
그 사람은 좀 빛나보이더라.
물론 굳이 빛나보이지 않아도 그와 그녀, 우리 모두는 충분히 빛나고 있다.
내 모자란 점을 극복하려고 애를 쓰는 대신
모자람을 어떻게 더 사랑하고,
'모자라다는 편견'을 내 마음 안에서 녹일 수 있는지에
더 집중하고 싶어지는 요즘이다.
그러면 조금 편안하고 수월하게
나를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어렵기만 한 삶이 조금 더 쉬워지지 않을까.
내가 나를 나무라지 않는 만큼, 나는 더 모자란 채로 괜찮은 사람이니까
그런 내가 아무렇지 않아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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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아주 오랜만에 내 얼굴을 그리게 되었다.
오랫동안 미워했던 뾰로통한 표정의 내가 좋아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