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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꽃차이 May 09. 2024

목표가 멀어 보일 때, 에키놉시스

면접 보러 갔는데 나를 부른 줄도 몰랐다

제가 오라고 했다고요?

두 달째 꽃집 아르바이트 도전 중이던 어느 날, 면접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집에서 멀지 않고 근무 시간도 맞는, 어렵게 발견한 곳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갔는데 사장님의 말이 당황스러웠다. 시간과 장소가 명시된 문자를 보여 드리면서 기운이 쪽 빠졌다.


당황스럽던 현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희한하게 자꾸 신이 났다. 아니, 면접 떨어진 사람이 이렇게 기분 좋을 일인가 살짝 당황스러울 만큼.


그날은 수능 날이었다. 강남역에는 수능을 마친 학생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그들을 보면서 그동안의 삶을 되짚어 보니 ‘지극히 주관적으로 그다지 나쁘지 않네.’ 싶었다. 아니, 이룬 것 없어도 이만하면 나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아니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세 남자가 있는데 이룬 게 없기는 뭐 없어. 제일 소중한 걸 이뤘잖아?


수능 친 날 나는 몰랐다. 오랜 세월 후의 수능 날 내가 이런 하루를 보낼 줄은. 그 사실이 꽤 즐거웠다. 다음 해, 다음다음 해 11월은 어떤 일이 있을까? 분명 오늘의 내가 생각지도 못한 무언가로 한 해가 채워졌을 거야. 아, 마구 보고 싶다, 나의 세 남자. 발걸음이 폴짝거리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취직이 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나의 실력이 아직 꽃집에서 원활히 근무할 정도가 아니었다. 얼마 뒤 생각지 못한 이사를 하게 되기도 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방학이 길어져서 꽃집 근무는 더욱 멀어졌다.


내게는 조그만 믿음이 있다. 당시엔 간절했어도 내 것이 되지 않은 건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이유가 있다고(아직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 건 천국 가서 물어봐야지 하고 마음 편히 덮어 둔다). 내가 실력이 생기면 더 좋은 기회가 오게 되어 있다고.


에키놉시스. 푸르딩딩한 밤송이 같은 꽃이다. 멋지고 독특한 것 같긴 한데 저걸 어디에다 어떻게 쓰지 싶어서 초보자는 선뜻 사지 않게 된다. 입에 착 붙지 않는 이름처럼 어렵다. 까슬거리고 가시도 있다.

이제는 이 꽃을 자유롭게 컬러 조합해서 쓸 수 있게 되었다. 익숙하지 않은 꽃과 컬러를 쓰는 계정과 사진을 수천 장 보고 또 보고, 실패하면서도 사 보면서 도전한 결과다. 그런 꽃들이 하나하나 늘고 있다. 그럴 때마다 나를 셀프 칭찬해 준다. 에키놉시스의 꽃말은 동심. 나도 자유자재로 어려운 꽃을 쓰고 싶다는 처음 소망을 생각나게 해 주는 사랑스러운 단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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