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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꽃차이 May 10. 2024

자존감이 하락세를 보일 때, 남천 나무

불합격 메일에서 위로를 받다

우선 지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죄송하게도 저흰 오후 시간인 2시, 3~7시, 8시 타임이 필요하고요. 때론 더 이른 오전부터 풀 타임으로 부를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가게 오픈도 해야 해서 아무래도 우리 가게에선 조금 곤란하겠네요.

그래도 참고로 시즌 때 도움이 필요하거나 할 때면 기억하겠습니다. 그리고 댁네에 항상 건강과 행복이 함께하길 빕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꽃집에 지원하고 받은 답 메일이었다. 시간은 안 맞았지만 혹시나 해서 지원서를 보냈고 큰 기대는 없었다. 답이 온 것부터가 놀라웠지만 이렇게 길게 오다니. 시간이 안 맞는다고 짤막하게 표현할 수도 있는데 구체적으로 알려 주신 배려도 감동이었다.

늦은 시간에 긴 답 메일 주셔서 감사합니다. 경력이 전혀 없는데 위로와 격려의 말씀 주시니 힘이 납니다. 그냥 읽고 넘기실 수도 있는데 이렇게 세심히 답해 주시는 마음을 갖고 계시니 오래 꽃집을 하실 수 있구나 하고 배우게 됩니다. 번창하시고 좋은 일 가득하길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또 메일이 왔다.

에구구 아주아주 긍정적인 사고의 ○○○ 님이시군요. 기억하고 있을게요. 항상 행운과 행복이 가득한 가정되길 기도드립니다~

내게 도움이 될 사람, 또 볼 사람에게 친절한 사람은 많다. 한겨울 눈 속에서 꽃을 본 듯한 놀라움은 그렇지 않은 관계에서 나온다. 어떤 인간관계 책보다도 깊은 울림을 주는 작은 사건이었다. ‘그 정도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친절’을 배운 대로 실천할 날을 기다리고 싶어졌다.


몇 년 뒤 우연히 그 꽃집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사장님 같은 분이 주문을 받고 계셨다. 웨이브단발에 수수하고 단정한 차림, 부드러운 인상의 50대 여자분이셨다. 속으로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말했다. ‘고맙습니다. 정말, 감사했어요.’


일을 찾아 고군분투하던 그 시절, 첫 꽃 일은 메일이 아닌 사람에게서 시작되었다. 웨딩&파티 플라워 클래스를 함께 배운 언니가 있었다. 언니는 케이터링 일을 오래 했는데, 큰 행사가 있어서 플라워 데코가 많이 필요할 때 내게 맡겨 주었다. 경력이 없는 나를 ‘전문가’라고 부르며 잘 꽂은 꽃이 조금만 있어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행사 플라워 데코는 늘 시간이 빠듯하고 신경을 바짝 써야 하는 현장이었다. 대부분 한두 시간 전에 행사장을 열어 주는데, 사람들은 30여 분 전부터 오기 시작하니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짧았다. 꽃도 많고 공간도 크다 보니 뛰어다니며 데코 하고 쫓기다시피 나오면 사진 찍을 시간조차 없었다. 사전준비는 행사장 옆 좁은 구석 한 평에서 바쁘게 이루어졌다. 갑자기 테이블이 추가된다거나 하는 요청 사항에도 대비해 두어야 했다.

  

미리 사 두고 작업하는 데 한계가 있는 게 꽃이라 쉽지 않다고 느꼈지만, 가까이서 함께 일해 보니 음식 준비는 더 고된 일이었다. 신선도와 온기가 중요하니 밤샘과 끼니 거르기가 일상이었다. 행사 내내 세심히 현장을 돌아보며 부족함이 없도록 해야 했고, 행사 후 정리도 어마어마했다. 그 일들을 언니는 정말 좋아서 했다.


좋은 걸 어떡해, 좋으니까 하지.   

고객에게만 촉각을 곤두세우고 맞춰 주기도 쉽지 않은 현장에서 수시로 내 입에 먹을 것을 넣어 주고 짐을 들어 주고 따뜻한 말로 나를 챙겨 줬다. 아이들 등·하원 시간에 맞춰야 하니 마무리를 하지 못하고 갈 때도 언니가 대신해 주었기에 일할 수 있었다.

그거 알아요? 꽃이 자기 닮았어.
어쩜, 역시 전문가는 달라.
손이 더 빨라졌네!

평생 간직하고 싶어서, 언니의 말들을 노트에 적어 두기 시작했다. 믿는 만큼 자란다는 말은 어른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자존감이 하락세를 보이고 이 길이 맞을까 싶을 때면 들여다보았다. 내 일을 애정하는 전문성에는 함께 일하는 사람을 배려하고 높여 주는 태도까지가 포함된다는 것도 되새겼다.

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꽃 시장에 파는 꽃과 나무들이 종종 있다. 역할에 맞게 매력을 잘 살려서 쓰는 전문가를 만나면 빛이 난다. “어머, 걔가 얘야?” 이렇게 다시 태어나 빛을 발한다. 누구와 어떤 일을 하느냐에 따라 사람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처럼.

날렵한 잎이 고급스러운 나무가 있다. 동그란 잎들 사이에 이런 잎을 넣어 주면 서로 돋보이게 하면서 모던해진다. 단풍도 들고 열매도 예쁘다. 꽃 시장에도 팔고 꽃다발에도 쓴다. 이 나무를 자주 활용하는 언니 덕분에 알게 되었다.


남천 나무. 꽃말도 전화위복. 집 앞에서 볼 때마다 간절했던 시기에 기회를 주고 롤 모델이 된 언니 생각이 난다. 누군가에게 잊지 못할 격려와 친절을 건네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초심도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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