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또 들으면
주차하고 나서 바로 내리지 않았다. 시간이 넉넉히 남아 있기도 했지만, 마음 샤워가 필요했다. 오래 운전하고 왔는데도 머리를 떠나지 않는 말들을 씻어 내고 싶었다. 오랜 세월 차는 내 마음의 샤워실이었다. 이 좁은 공간에서 강풍에 헝클어진 머리를 빗듯이 마음결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내려야 할 일이 꽤 많았다.
그날도 깊이 그리고 길게 숨을 들이마시고 마지막 한 조각까지 내쉬었다. 그리고 내 귀에 또렷이 들리도록, 한 글자 한 글자 차분히 말해 주었다.
나는 꽃이 주는 기쁨을 전하러 왔어. 나는 잘 해낼 거야. 이건 시작이야.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첫 학교 수업의 기억이다. 나름대로는 그동안의 수업 사진, 데코 사진 모두 활용하고 정보를 샅샅이 찾아서 이뤄 낸 일이었다. 숫자라는 돌덩이는 몽글한 꿈 거품을 푹 눌러 버린다. 한 번에 강사료는 3만 원, 재료비는 인당 7천 원, 거리는 1시간. 적자 아니냐는 말이 맞긴 했다. 빨간 지붕이 예쁜 집이 그래서 얼마냐고 물었다는 어린 왕자 속 어른들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런데 말이다, 사실이라고 해서 인풋으로 받아들이느냐는 내 선택이다. 마음 계좌 비밀번호는 나만 안다. 마음의 입출금기에 무엇을 입금하고 출금할 것인가, 마음이 적자일 때 재빨리 어떤 말을 넣어 줄 것인가는 온전히 나의 몫이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라고들 한다. 말이 볼링공 나오듯 굴러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아쉽게도 한 뼘쯤 될 양쪽 귀 사이에는 통로가 없다. 말이라는 게 그렇게 느릿느릿 움직이지도 않는다. 귀로 들어간 말은 반대편 귀가 아니라 마음으로 질주하기 마련이다. 빼내지는 못하더라도, 귀에 내가 다른 말을 넣어 중화시킬 수는 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또 듣고.
아마릴리스는 존재감이 강한 꽃이다. 작약, 킹다알리아, 해바라기 등 얼굴이 큰 꽃은 적지 않아도 아마릴리스처럼 프라이팬 손잡이 같은 매끈하고 굵은 줄기를 지닌 꽃은 드물다. 길이도 어른 팔 길이만 하다. 손바닥만 한 꽃 얼굴이 강렬한 빨강, 밝은 주황, 화사한 하양이라 멀리서 찍는 카메라에도 눈에 확 띈다. 방송 플라워 데코에서 주연 역할을 한다.
그런데 강인해 보이는 아마릴리스 줄기에 비밀이 있다. 바로 속이 비어 있다는 것. 마치 대파의 초록 부분을 좀 더 두껍고 단단하게 만든 모양새다. 얼굴이 크고 무겁다 보니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곤 한다. 기다란 화병에 꽂아 주고 줄기에 막대기를 꽂아 주는 맞춤 처방이 필요하다. 줄기 끝부분이 잘 말려 올라가니 스카치테이프도 감아 주어야 한다.
속 빈 줄기 같은 일을 할 때가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럴싸하지만, 돈은 안 남는 일. 괜찮다. 막대기로 단단하게 만들면 된다. 꽃병의 물을 매일 갈아 주듯 마음 찌꺼기를 떠내려 보내면 첫 마음이 맑은 지하수처럼 스며든다.
강사료가 3만 원인 클래스를 50만 원인 클래스처럼 하면 결국 50만 원을 받게 된다. 50만 원 클래스처럼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내가 내 일에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남과 다르게 할 수 있는 것들을 쌓아 나가면 알아보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팔아 달라고 할 만큼 고운 린넨 앞치마, 포토존과 인생 사진, 사진 찍는 법, 집에 가는 길에 사람들이 어디서 샀냐고 물어 오는 예쁜 포장과 운반백(늘 강조한다. 꽃은 운반감이라고!) 등 나만의 치트키를 쌓아 갔다.
이제는 쌓아 온 가치만큼 받는다. 하지만 언제든 내 위의 사람들이 보인다. 나만의 막대기는 늘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