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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꽃차이 May 12. 2024

내 처음이 너무 작을 때, 양귀비

미운 아기 깍지의 1/20

행사 플라워 데코 일로 만든 경력으로 서울과 경기도 교육청 사이트 구직난에 글을 올렸고, 학교 경력도 생겼다. 차곡차곡 즐겨찾기 폴더에 모아 둔 사이트들을 활용할 시점이 왔다. 바로 자원봉사로 강사 지원할 수 있는 곳이었다.


우선은 묵묵히 양을 채우기로 했다. 될까 싶은 생각과 불안한 감정을 버리자. 20개만 해 보자. 하나는 되겠지.     


처음에는 20개 보내면 1개 답이 왔다. 강남구청에서는 메일을 보낸 지 1년이 지나서 전화가 왔다. 온라인 수업을 할 수 있는 강사가 많지 않은 덕분이기도 했다. 나 역시 능숙하지 못했다. 인스타에서 무료 줌 수업을 열었다. 재료를 배송해서 잘 도착하는지 확인하고 줌으로 수업하며 기능을 익히고 코멘트를 받았다.


수업에 대한 반응이 좋고 결과물이 예쁘니 강남구청 소식지에 실리기도 했다. 강남구청에서 수업했다는 이력이 다른 기관과 연결 고리가 되었다. 20전 1승이 점차 10전 1승, 5전 1승, 10전 9승으로 올라갔다.

 

도서관 수업도 자원봉사로 시작했다. 짧지만 생각할 거리가 많은 그림책을 골라서 토론했다. 수업 만족도를 높이는 나만의 노하우를 공개하자면, ‘예상 못 한 것들’을 제공하는 것이다. 수강생들은 대부분 단순 체험 활동 정도로 생각하고 오니 많다. 책을 깊이 읽는 법과 배경 지식, 여러 꽃 상식, 의미 있는 나눔, 내 이야기를 할 기회, 귀 기울여 들어 주는 강사와 사람들, 내 취향에 따라 선택 가능한 고급 재료까지.


재료는 넉넉하게 가져가서 남긴다. 그러면 남은 재료를 가져가도 되는지 묻는 분들이 꼭 있다. 흔쾌히 담아 드리면 작은 것에 기뻐하시는 모습에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그것도 거절을 감수하고 용기 낸 부탁이라 들어드리고 싶다. 적어도 내 태도가 거절할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 아닐까 주관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수강생들은 수업이 끝나자 빠르게 자리를 뜨는 대신 천천히 대화도 하고 두둑한 재료를 소중히 챙기셨다. 이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는 것을 아쉬워하는 듯했다. 수업이 정말 좋았다고 선생님의 다음 수업은 언제냐고 물어들 보셨고, 몇 분은 개인적으로 클래스를 부탁드려도 되냐며 연락처를 받아 가셨다. 담당자에게 내 연락처를 물어보는 분들도 계셨다.


선생님 수업이 정말 좋았나 봐요! 제게 연락처를 물어보셨는데 알려 드려도 될까요?


담당자는 놀라워하며 다음에도 수업해 달라고 하셨다. 다른 도서관에 근무하게 되신 후에도 수업을 부탁하셨고, 다섯 도서관에 내 수업을 추천하셨다.

처음과 끝의 간극이 가장 먼 꽃이라면 단연 양귀비다. 투박한 카키색에 뭉뚝하고 까슬거리는 털이 숭숭 나 있는 몽우리와 줄기가 멋과는 거리가 멀다. 미운 아기 깍지랄까. “이게 꽃이에요? 피어요?”라고들 할 정도다. 모르는 사람은 절대 사 오지 않을, 기대감 들지 않는 비주얼이다.

양귀비의 개화는 햇빛과 온도에 무척 민감하다. 시원한 그늘에 두면 일주일 내내 안 피지만 햇빛 드는 곳에 두면 몇 시간 만에 피기도 한다. 세련되지 않은 깍지 사이로 구겨진 한지 같은 꽃잎이 깍지를 영차영차 밀어내다가 툭 떨어뜨린다. 꾸깃꾸깃 접힌 꽃잎이 꼭 방금 태어난 신생아 같다.


다른 꽃은 몽우리에서 꽃잎이 보일 때부터 크기랑 빛깔만 다르고 귀여운 느낌이 있는데 이래서 예뻐질까 싶다. 하지만 일단 꽃잎을 피기 시작하면 고혹적인 자태를 뽐낸다. 구불구불한 줄기는 햇빛을 찾아간 여정의 기록, 직선이 가질 수 없는 스토리를 담는다. 신비한 느낌에 툭 꽂아도 멋스럽고 컬러도 노랑, 다홍, 주황이어서 사진이 잘 나온다. 마약에 쓰이지 않느냐는 질문도 많이 받는데, 그런 양귀비는 종류가 따로 있으니 안심해도 된다.

몽우리 상태인 양귀비를 여러 지인에게 보내곤 한다. 부피가 작고 줄기도 부러지지 않아서 보내기 쉽기도 하지만, 응원을 함께 담고 싶어서다. 다음이 보이지 않는 시작을 앞둔 사람에게는 더욱. 꽃이 피면 다들 감탄한다.

와, 이래서 양귀비가 양귀비구나!
양귀비는 역시 양귀비네요!

그 감탄, 이제 당신 차례라고 말해 주는 따사로운 햇볕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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