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의 우림, 세 번의 나

서울 연희동 다도레 티룸 & 차명상

by 방랑티객

Credit: Photo by Falaq Lazuardi, Unsplash


중동 3개월 살이를 급히 마치고 돌아온 바로 다음 날 아침. 시차 적응도 안 된 채, 새벽까지 말똥말똥 뒤척이다 결국 늦잠을 잤다. 하필이면 오늘이 예약해둔 차 명상 체험일인데.


띠르르... 띠르르...

"저... 크흠, 저가... 그, 오늘 차 명상 신청한 사람인데요."

입냄새가 전화기 너머까지 전해질 것만 같아 말을 더 잇기조차 힘겨웠다.

"크흠, 제가...늦잠을 자서요... 정말 너무 죄송한데, 혹시 다른 시간대로 좀... 옮길 수 있을까요...."

당연히 안 될 거야. 왜 그랬을까. 속으로 광광 울며 자책하던 그때—

"혹시 몇 시까지 오실 수 있으실까요?"

엇?

"한 시간 안엔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최대한 빨리 오세요. 이따가 뵙겠습니다 (친절)"

"가... 감사합니다!"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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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속에 허겁지겁 택시에 올랐다.

왜 그랬을까. 덜 마른 머리는 미역처럼 젖어 있고, 잠도 덜 깬 이 상태로 무슨 명상이냐. 그냥 전화해서 못 간다고 할까? 명상하다가 잠들면 어쩌지? 울까?

뒤엉킨 생각들을 심호흡으로 달래며, 창밖으로 꽉 막힌 도로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렇게 스스로의 멱살을 잡아 끌고 갔더니, 결국 티룸 앞에 도착했다.

'하, 진짜. 나 하나 데리고 사는 일이 이렇게 힘든 거였나.'

이마 한가운데가 뻐근해진다.


문을 밀고 들어서자, 은은한 향과 고요가 스르르 나를 감싸 안는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어'라고, 속삭이는 듯한 공기가 가만히 나를 반긴다.

아직 정신은 반쯤 깨어 있었지만, 몽롱한 건 니었다.

멱살 잡혀 억지로 끌려온 몸뚱이가, 그제야 제 감각들의 제자리를 하나씩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운 좋게 참여하게 된 차 명상 체험.

시작에 앞서, 선생님께서 빈 속을 다스릴 수 있도록 향긋한 쑥차 한 잔을 건네주셨다. 누군가의 속도에 귀 기울일 줄 아는 다정한 배려였다.


연희동에 위치한 다도레 티룸에서는 티코스와 원데이 클레스를 운영하고 있다. 클래스는 차에 대한 기초 지식과 다구 실습이 포함된 '기초 티클래스'와 차를 오감으로 음미하며 깊은 휴식을 경험하는 '차 명상 클래스' 두가지가 있다.


내가 명상 클래스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하다. 차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그냥 마시면 그만이지만, 차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다. 그 안에 깃든 방식과 태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내 삶 속에서 지속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런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런 생각으로 수업에 참여했는데, 다도레 티룸의 사장님이자 차 명상 선생님이신 팽주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차를 처음 접하는 분들께는 기초 티클래스보다 차 명상 클래스를 더 권하는데, 이유는 명상을 통해 '차를 대하는 태도'와 '자신을 인지하는 법'을 먼저 익히는 것이 더 본질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그런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명상' 훈련이며, '차'는 그 과정을 부드럽게 이끌어주는 하나의 매개인 셈이다. 매게는 개인의 기호와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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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명상은 하동 우전 녹차를 세 번의 우림(차 우리기) 과정을 통해 진행되었다.


1 - 첫 번째 우림에서는, 까맣게 오므라든 찻잎이 서서히 물을 머금으며 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의 몸과 마음에도 스며든 긴장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눈을 감고 향을 맡는 순간, 하동의 고지대에 흐릿하게 안개가 내려앉은 봄날의 차밭 풍경이 떠올랐다. 부드러운 풀내음과 함께, 아기 젖내처럼 고소한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2 - 두 번째 우림은 차의 유효성분이 가장 풍부하게 우러나는 시점이다. 향은 더 짙어지고, 입안엔 은은한 쌉싸름함이 가득 차오른다. 몸속 깊이 남아 있던 긴장마저 이 단계에서 말끔히 풀어지는 듯했다.


3 - 세 번째 우림은 다져진 정신과 퍼진 온기를 마무리 짓는 시간이다. 감각은 더욱 섬세해지고, 찻잎은 오동통하게 부풀어 오른다. 입 안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질감까지, 오감이 깨어나는 경험 속에서 '아, 이렇게 살아 있구나'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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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도레 티룸에서의 시간이 특별했던 건, 그 한 잔의 차에 담긴 의미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전하려는 사람이 만든 공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장님은 어릴 적 부터 차를 즐기시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차를 접하게 되었다고 한다.

'차 마시자'는 말이 아직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낯설게 느껴지던 시절부터 이 길을 걸어오셨다고. 취미가 '차 마시기'라고 하면 할머니 같다는 농담을 듣던 때부터, 지금까지 7년째 이 티룸을 운영해오신 젊은 사장님의 신념은 단단하고 조용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이곳에서는 단순한 힐링을 넘어, 차 한 잔을 통해 삶의 태도를 조용히 되새겨보게 된다.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차로 맺어진 인연을 '차연(茶緣)' 이라 한다는데, 첫 방랑티객 여정의 시작이 좋은 차연으로 이어진 듯하다.


그 날의 따뜻한 인연에 감사드리며, 언젠가 조용히 다시 머무르러 오겠습니다.

달리기를 즐기신다니, 언젠가 함께 뛰게 될 날도 오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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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내돈내 >


1) 어린 봄쑥 잎차: 쑥차는 무카페인 차로 달콤, 고소한 맛이 난다. 아침에 매일 마시고 싶어서 30g 데려간다.


2) 하동 우전 녹차: 우전차는 4월 봄날 가장 처음으로 딴 어린 찻잎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접하는 녹차에서 느낄 수 없는 부드러운 쌉싸름함이 인상 깊었다.


3) 하동 할매 띄움차: 메주 장인 할머님이 전통 누룩 띄움 발효기법으로 만들었다. 발효에서 오는 요거트에서나 느낄 법한 산미와 고소함, 그리고 입 안에 맴도는 꽃향의 조화가 독특하다. 발효되어 카페인 영향이 적고 속에서 편안한 차.